* 안 보이는 사랑 - 송재학
강물이 하구에서 잠시 머물듯
어떤 눈물은 내 그리움에 얹히는데
너의 눈물을 어디서 찾을까
정향나무와 이마 맞대면
너 웃는 데까지 피돌기가 뛸까
앞이 안 보이는 청맹과니처럼
너의 길은 내가 다시 걸어야 할 길
내 눈동자에 벌써 정향나무 잎이 돋았네
감을 수 없는 눈을 가진 잎새들이
못박이듯 움직이지 않는 나를 점자처럼 만지고
또다른 잎새들 깨우면서 자꾸만 뒤척인다네
나도 너에게 매달린 잎새였는데
나뭇잎만큼 많은 너는
나뭇잎의 不滅을 약속했었지
너가 오는 걸 안 보이는 사랑이 먼저 알고
점점 물소리 높아지네 *
* 오광수엮음[시는 아름답다]-사과나무
* 환승
고물이 통통한 배가 꼭 제 덩치만 한 배에 접근했다 배꼽 근처에서 낭랑한 입이 열리고 물컹한 다리가 걸쳐지자 통통의 승객들이 덩치로 옮겨 탄다 환승이다 하지만 내 시선에 붙잡힌 것은 눈꼬리가 샐쭉한 주선강(舟船綱)의 포유류이다 엉덩이가 더 큰 엉덩이에 들이대는 다정다감, 저들의 짝짓기에서도 쇠냄새는 없다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혀 같은 환승이 끝나고 엉덩이를 돌려 헤어질 때까지 이 뚱뚱하고 오래된 짐승들은 멈칫멈칫 젖은 살을 부빈다 물 위의 그림자들 포개지며 일렁거리며 마지막까지 머뭇거린다 *
* 송재학시집[내간체를 얻다]-문학동네
* 눈의 무게
느티나무 가지에 앉은 눈의 무게는 나무가 가진 갓맑음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느티나무가 입은 저 흰옷이야말로 나무의 영혼이다
밤새 느티나무에 앉은 눈은 저음부를 담당한 악기이다
그때 잠깐 햇빛이 따뜻하다면 도레미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도 보일 게다
* 동백나무는 흉터를 남기지 않는다
백련사 동백숲 근처는 인가가 보이지 않는다
이월이면 사람의 병이 옮겨 가는 동백나무에는 매듭이 없다
그 나무의 여성성은 잘려진 분지를 둥글게 감싼다 어떤 흉터
라도 희고 부드러운 껍질로 감싸 버리는 동백의 잎은 범종의
공명으로 두터워졌다
번개도 그 나무의 속을 엿볼 수 없다
혹한만이 그 나무를 서서히 열어 보인다.
동백이 피운 꽃이란 동백이 스스로 불켠 창의 넓이
붉은색의 극점까지 가서 꽃잎으로 흰 눈의 숨은 핏빛을
비교하는
붉은색이란 그때 떠도는 넋에 가깝다
엎드린 꼽추처럼 병을 집어삼킨 둥근 혹을 달고 동백은 다시
움츠린 몸으로 제 신열의 암자를 세운다
* 공중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뒷목과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새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게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라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
* 풀 잎
풀잎 앞에 쓰러져
울어준 것들만의 힘으로
풀잎이 초록은 아니다
풀잎이 가진 초록이란
일생을 달리고도 벗어날 수 없는
오랑캐 들판
그 넓이만큼 죽음이나 여름을 만난다
풀잎은 지는 해를 위해
수평선의 고요를 아꼈던 것
초록이 운명에 휩쓸릴 때
초록은 그곳까지 한달음에 도착하기도 한다
풀잎 속이라면
초록은 일제히 일어나야 할 때를 알고 있다 *
* 마흔 살
미나리와 비슷하게 습지 따라가거나
잎과 줄기를 삶아 먹기 때문에 나온
미나리아재비란 이름에는 마흔 살의 흠집이 먼저다
제 이름 없이 더부살이한다는 의심이 먼저다
다섯 장의 꽃잎이 노란 것도
식은 국물같이 떠먹기 쉬운
약간은 후줄근한 아재비란 촌수 탓이다
저 풀의 독성이란 언젠가 다시 켜보려는 붉은 알전구들
돌아갈 수 없는 열정이
저 풀을 이듬해에 또 솟구치도록 숙근성으로 진화시켰다
노란 꽃 찾는 꿀벌의 항적(航跡)도 명주나비 얼룩무늬도
미나리아재비 살림의 쓴맛 단맛
막무가내 번식하는 미나리아재비 군락을 지나간다면
일장춘몽 쓸개는 곰비임비 햇빛에 널어라
양지에 피어난 것이 어디 미나리아재비뿐이냐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마흔 살 너머! *
* 노을
나는 더러운 청춘의 끝에 서서 부글거리는 강물을 후회로
바라보았다 썩은 폐를 거쳐간 연애와 밥을 생각할 때 검은
강은 거품과 기억을 섞었다 누군가 창밖으로 찢어진 편지
와 노래를 던졌다 나는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고 지나간 날과
세상은 노을에 뜯기며 금빛으로 물들어갔다 짐승의 부르짖음
이 젊은 영혼을 덮쳤다 아니다, 오직 울음만 남은 젊은 영혼
이 짐승과 드잡이질하며 낮과 밤을 핏빛으로 적셨다 *
* 흰뺨검둥오리
그 새들은 흰 뺨이란 영혼을 가졌네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에서 흰색까지 모두
이 늪지에선 흔하디흔한 맑음의 비유지만
또 흰색은 지느러미 달고 어디나 갸웃거리지
흰뺨검둥오리가 퍼들껑 물을 박차고 비상할 때
날개소리는 내 몸 속에서 먼저 들리네
검은 부리의 새떼로 늪은 지금 부화 중,
열 마리 스무 마리 흰뺨검둥오리가 날아오르면
날개의 눈부신 흰색만으로 늪은 홀가분해져서
장자를 읽지 않아도 새들은 십만 리쯤 치솟는다네
흰빰검둥오리가 떠매고 가는 것이 이 늪을 포함해서
반쯤은 내 영혼이리라
지금 늪은 산산조각나기 위해 팽팽한 거울,
수면은 그 모든 것에 일일이 구겨지다가 반듯해지네 *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지붕
버려둔 시골집의 안채가 결국 무너졌다 개망초가 기어이 웃자랐다 하지만 시멘트 기와는 한 장도 부서지지 않고 고스란히 폴싹 주저앉았다 고스란히라는 말을 펼치니 조용하고 커다랗다 새가 날개를 접은 품새이다 알을 품고 있다 서까래며 구들이며 삭신이 다치지 않게 새는 날개를 천천히 닫았겠다 상하진 않았겠다 먼지조차 조금 들썽거렸다 일몰이 깨금발로 지나갔다 새 집에 올라갈 아이처럼 다시 수줍어하는 기왓장들이다 저를 떠받쳤던 것들을 품고 있는 그 지붕 아래 곧 깨어날 새끼들의 수다 때문이 아니라도 눈이 시리다 금방 날개깃 터는 소리가 들리고 새집은 두런거리겠다
* 송재학시집[내간체를 얻다]-문학동네
* 소래 바다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래 포구의
난전에서 본다. 벌써 귀밑이 희끗한
늙은 사람과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서른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난날
장사를 하느라 흥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병이라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소래에 오고 싶어하셨다
아니 소래의 두꺼운 시간같은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새치 많던 아버지, 바닷물이 밀려나가는
일몰 끝에서 그이는 젊은 여자가 따르는
소주를 마신다, 그이의 손이 은밀히 보듬는
그 여자의 배추 살결이
소래 바다에 떠밀린다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송재학시인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6년 [세계의문학] 등단, 1994년 김달진문학상, 2010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얼음 시집][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내간체를 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