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능소화 시 모음

효림♡ 2011. 7. 12. 09:23

 

* 능소화 -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중앙


* 저 능소화 - 김명인  

주황 물든 꽃길이 봉오리째 하늘을 가리킨다

줄기로 담벼락을 치받아 오르면 거기,  

몇 송이로 펼치는 생이 다다른 절벽이 있는지

더 뻗을 수 없어 허공 속으로

모가지 뚝뚝 듣도록 저 능소화

여름을 익힐 대로 익혔다

누가 화염으로 타오르는가, 능소화

나는 목숨을 한순간 몽우리째 사르는

저 불꽃의 넋이 좋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 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그게 암 덩어리라도 불볕 여름을 끌고

피나게 기어가 그렇게 스러질

너의 여름 위에 포개리라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중앙


* 당신을 향해 피는 꽃 - 박남준 
능소화를 볼 때마다 생각난다
다시 나는 능소화, 하고 불러본다
두 눈에 가물거리며 어떤 여자가 불려 나온다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니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여자가 나타났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어 나무에, 돌담에
몸 기대어 등을 내거는 꽃
능소화꽃을 보면 항상 떠올랐다
곱고 화사한 얼굴 어느 깊은 그늘에
처연한 숙명 같은 것이 그녀의 삶을 옥죄고 있을 것이란 생각
마음 속에 일고는 했다

어린 날 내 기억 속의 능소화꽃은 언제나
높은 가죽나무에 올라가 있었다
연분처럼 능소화꽃은 가죽나무와 잘 어울렸다
내 그리움은 이렇게 외줄기 수직으로 곧게 선 나무여야 한다고
그러다가 아예 돌처럼 굳어가고 말겠다고
쌓아올린 돌담에 기대어 당신을 향해 키발을 딛고
이다지 꽃 피어 있노라고

굽이굽이 이렇게 흘러왔다
한 꽃이 진 자리 또 한 꽃이 피어난다

* 박남준시집[적막]-창비

 

* 능소화 - 김영남 
오해로 돌아선 이
그예 그리움으로
담을 타는 여인
아래 벗겨진 신발
모두 매미 소리에 잠들어 있구려
내 아직 늦지 않았니? *

 

* 능소화 - 김광규

7월의 오후 골목길 

어디선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내는

바이올린 소리  

누군가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담 너머 대추나무를 기어올라가면서

나를 돌아다보는

능소화의

주황색 손길

어른을 쳐다보는 아기의

무구한 눈길 같은 *

 

* 능소화 - 나태주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뚝

떨어지는 어여쁜
슬픔의 입술을 본다

그것도
비 오는 이른 아침

마디마디 또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 능소화 - 김선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랍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凌宵)야 능소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이야 아니되어도 능소야 능소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 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 째 툭, 툭, 떨어져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

* 능소화 편지 - 이향아   
등잔불 켜지듯이 능소화는 피고
꽃지는 그늘에서
꽃 빛깔이 고와서 울던 친구는 가고 없다
우기지 말 것을
싸웠어도 내가 먼저 말을 걸 것을
여름이 익어갈수록 후회가 깊어
장마 빗소리는 능소화 울타리 아래
연기처럼 자욱하다
텃밭의 상추 아욱 녹아 버리고
떨어진 꽃 빛깔도 희미해지겠구나
탈없이 살고 있는지 몰라
여름 그늘 울울한데
능소화 필 때마다 어김없이 그는 오고
흘러가면 그뿐 돌아오지 않는단 말
강물이야 그러겠지
나는 믿지 않는다

* 능소화 연가 - 이해인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나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

* 이해인꽃시집[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분도출판사

 

* 여름 능소화 - 정끝별  

꽃의 눈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이

벼랑이 벼랑 끝에 발을 묻듯
허공이 허공의 가슴에 달라붙듯
벼랑에서 벼랑을
허공에서 허공을 돌파하며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도
더운 목젖을 돋우며

오뉴월 불 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

꽃의 살갗이 바람 드는 것과
꽃의 마음이 붉게 멍드는 것과
꽃의 목울대에 비린내가 차오르는 것과
꽃의 온몸이 저리 환히 당겨지는 것까지 *

* 정끝별시집[삼천갑자복사빛]-민음사

 

* 능소화 - 문성해

담장이건 죽은 나무건 가리지 않고 머리를 올리고야 만다
목 아래가 다 잘린 돼지 머리도 처음에는 저처럼 힘줄이 너덜거렸을 터
한 번도 아랫도리로 서본 적 없는 꽃들이
죽은 측백나무에 덩그랗게 머리가 얹혀 웃고 있다

 

머나먼 남쪽 어느 유곽에서도
어젯밤 그 집의 반신불수 딸이 머리를 얹었다고 한다
그 집의 주인 여자는 측백나무처럼 일없이 늙어가던 사내 등에
패물이며 논마지기며 울긋불긋한 딸의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짊어 보냈다고 한다

 

어디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

 

우툴두툴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도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볼우물을 패는 꽃이 있다

* 능소화 - 윤재철

어둠속에서 담배를 핀다 칠흑 같은 바다의 어둠과 침묵 그리고 소멸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오는 허무의 꽃 꿈인지도 모른다 꿈의 꿈인지도 모른다 몽환의 화려한 꽃불 꽃가지 언제부터인가 눈에서 귀에서 검은 입 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 울음의 끝에서 환히 피어오르는 꽃가슴 저 끝에 뿌리박은 듯 뻗어올라 가슴 가득 뒤덮은 능소화 푸른 잎 피어오르는 주황빛 저 꽃 *

 

* 능소화 - 권혁진 

초여름 곱고 고운 黃桃(황도)빛

화사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담장 위에 피어난 그대

 

구중궁궐의 소화라는 궁녀

그대가 빈이 됨으로

주변의 시샘이 있어

외진 궁궐로 밀려나니 

 

기다림에 지친 궁녀는

마침내 상사병에 걸려

어느 여름날 숨을 거두고

 

담장에 초라하게 묻히니

그리운 님을 찾는 넋이

예쁜 꽃으로 피어났네!

 

임금님을 사모하는 그리움에

담장 밖을 멀리 보려고

목을 길게 빼고 올라와

매혹의 자태 뽐내고 있구나 

 

* 능소화 - 오세영

배신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이다지도

아름답더냐.

체념의 슬픔보다 고통의 쾌락을 선택한

꽃뱀이여,

네게 있어 관능은 사랑의

덫이다.

다리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가슴으로 칭칭

감아 올라

마침내

낼룽거리는 네 혀가 내

입술을 감쌀 때

아아, 숨막히는 죽음의 희열이여.

배신이란 왜 이다지도 징그럽게

아름답더냐. *

* 오세영시집[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고요아침

 

* 능소화, 덩굴꽃 - 이은봉 
몇 안 남은 이파리들 겨우 매달고
개가죽나무, 비쩍 마른 모습으로 서 있네

능소화, 덩굴꽃 
아등바등 타고 감고 기어오르네

이것들, 무엇이든
타고 감고 기어올라가야지

악착같이 능소화, 들뜬 꽃 
깡마른 개가죽나무 끌어안고 놓지 않네

황금빛 종소리로 울려퍼지는
능소화, 환한 꽃 

토닥토닥, 화장한 얼굴
..... 해맑은 목소리, 곱기도 해라

개가죽나무 가난한 이파리들
숨 헐떡이며, 입 딱 벌린 채 내려다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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