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 - 김춘추
달덩이같이뽀오얀비구니가
복숭아밭에서몰래소피를볼
때때마침지나가던둥근달이
털이보숭보숭한복숭아와박
덩이처럼잘익은엉덩이를보
고또보고웃다가기어이턱이
빠져목구멍목젖까지환하다 *
* 낮달 - 조병화
세월이 잃고 간 빛처럼
낮 하늘에
달이 한 조각 떨어져 있다 *
* 달 - 김용택
앞산에다 대고 큰 소리로,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소리로
당신이 보고 싶다고 외칩니다
그랬더니
둥근 달이 떠올라 왔어요 *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이 밤 너무나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 입맞춤 - 김용택
달이 화안히 떠올랐어요.
그대 등 뒤 검은 산에
흰 꽃잎이 날았습니다.
검은 산속을 나와
달빛을 받은
감미롭고도 찬란한
저 꽃잎들
숨 막히고, 어지러웠지요.
휘황한 달빛이야
눈 감으면 되지만
날로 커가는 이 마음의 달은
무엇으로 다 가린답니까. *
* 눈썹 달 - 신달자
어느 한(恨) 많은 여자의 눈썹 하나
다시 무슨 일로 흰 기러기로 떠오르나
육신은 허물어져 물로 흘러
어느 뿌리로 스며들어 완연 흔적 없을 때
일생 눈물 가깝던 눈썹 하나
영영 썩지 못하고 저렇듯 날카롭게
겨울 하늘에 걸리는가
서릿발 묻은 장도(粧刀) 같구나
한이 진하면 죽음을 넘어
눈썹 하나로도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 누구도 못 풀 물음표 하나를
하늘 높이에서 떨구고 마는
내 어머니 짜디짠 눈물 그림자 *
* 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신(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
*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 송찬호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가는 포도의 혀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낯설게 한다 *
* 둥근 달에게 달마를 묻다 - 최동호
붉은 살덩어리
어린 아해가 막 울고 있는데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먹구름은 까마득한 날부터
빗방울의 길을 따라 바다로 흘러갔다네
어린 아해는 목이 붓도록 울어도
오갈 것이 본래 없는데
숯검덩이 달마는 탈바가지 덮어쓰고
왜 동쪽으로 찾아왔는가
달빛 잔잔히 누빈 강물에
달마 눈썹 하늘 비추니
서쪽 하늘에서 떨어진 둥근 달아
네 가는 곳이 어디더냐
엉덩짝을 걷어차니
뜰 앞의 짚신 한 짝! *
* 최동호시집[공놀이하는 달마]-민음사
* 초승달 - 정희성
혹은
이상한 나라의 밤하늘에 몸을 숨긴
모습 없는 고양이의 웃음! *
* 秋夕달 - 정희성
달을 건져내며 울었다
밤새 수저로 떠낸 달이
떠내도 떠내도 남아 있다
광한전도 옥토끼도 보이지 않는
수저에 뜬 맹물달
어쩌면 내 생애 같은
국물을 한 숟갈 떠 들고
나는 낯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보아보 보아도
숟갈을 든 채 잠든
자식의 얼굴에 달은 보이지 않고
빈 사발에 한 그릇
달이 지고 있다.
* 달밤 1 - 박용열
달밤에
달이 밝아서
연잎 위에 청개구리
"퐁당"
달 따러 가네 *
* 초저녁 달 - 박형준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
화로가의 농담(濃淡)으로 식어간다
내게도 그런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 *
* 달의 우물 - 박형준
보름달이 드는 밤엔 달 흔적이 선명해진다
달에는 우물이 있고
그 속에는 짐승이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가끔씩 더운 입김이 달 그늘에 서린다 *
* 만월(滿月) - 김명수
내 죄지은 사랑에 대하여
그대 만나고 돌아오는 길
둥근 달이 내뒤를 따라왔어요
죄짓고 고개 숙여 걷는 내 곁을
손잡고 함께 걷자 따라왔어요
* 낮달 - 신현정
와, 공짜달이다
어젯밤에 봤는데 오늘 또 본다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놈이면
오늘 공짜달을 다 보는가 말이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달빛 소나타 - 신현정
가을밤을 앉아 있는//
그녀의 목덜미가 하도 눈부시게 희어서//
귀뚜라미가 사는 것 같아서//
달빛들이 사는 것 같아서//
손톱들이 우는 것 같아서//
그녀의 등 뒤로//
살그머니 돌아가서//
오오 목덜미에//
단 한번의//
서늘한 키스를 하고//
아 그 밤으로//
그대로 달아난 나여.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달밤 - 장석남
내가 아는 한곳은 거, 달 떠올라오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아 보름이면 수만 아이들이 깔깔대며 매달려 못 뜨게 하는 것 같고 그래도 빙긋이 웃으며 뜨는 것 같고 내가 사랑한, 아마도 저승까지 갈, 바지와 홑조끼와 스웨터를 골라 사듯 사랑한 그네는 조바심으로 또 서편에서 잡아 끌어당기는 것 같고 근데도 빙긋이 그저 그만그만히 바로 가진 못하여 하늘 정수리를 향하여 떠올라 가는 것 같고..... 내가 아는 한곳의 밤은 그러나 오늘은 흐려 달 없겠고 이미 보름도 다 지나 이지러진 채 그네처럼 먼데서나 지나가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혼자가 다시 혼자가 되고흐린 하늘도 또 흐려서 출가자의 버릇처럼 향(向)도 없이 절이나 해보다가 파(罷)하고는 무릎이나 가슴 쪽에 오그려붙인다 *
* 장석남시집[빰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 달의 뒤편 - 장석주
그믐밤이다, 소쩍새가 운다.
사람이건 축생이건 산 것들은
사는 동안 울 일을 만나 저렇게 자주 운다.
낮엔 喪家를 다녀왔는데
산 자들이 내는 울음소리가 풍년이었다.
무뚝뚝한 것들은 절대 울지 않는다.
앞이 막혀 나갈 데가 없는 자리에서
'죽음!'이라고 나직이 발음해 본다.
혀뿌리가 목젖에 붙어 발음되는
이 어휘의 슬하에 붙은 기역 받침과
막다른 골목의 운명은 닮아 있다.
저녁 산책길에서 똬리 튼 뱀을 만나고
저수지에서는 두어 번 돌팔매질을 했다.
작약 꽃대가 두 뼘 넘게 올라왔다.
그믐밤이다, 直立人의 앞길이 캄캄하다.
소쩍새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시는 커피는 쓰고 깊고 다정하다.
다시 혼잣말로 '죽음!'해 본다.
바닥이라고 생각한 그것은
바닥이 아니었다.
* 토끼에게로의 추억 - 신현정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 눈은 단추 같다
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보았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
* 반달 편지함 - 이정록
오늘밤엔 약수터 다녀왔어요 플라스틱 바가지 입술 닿는 쪽만 닳고 깨졌더군요 사람의 입, 참 독하기도 하지요
바가지의 잇몸에 입술 포개자, 첫키스처럼 에이더군요 사랑도 미움도 돌우물 바닥을 긁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이죠
그댈 만난 뒤 밤하늘 쳐다볼 때 많아졌죠 달의 눈물이 검은 까닭은 달 등짝에 써놓은 수북한 편지글들이 뛰어내리기 때문이죠
때 묻은 말끼리 만나면 자진하는 묵은 약속들, 맨 나중의 고백만으로도 등창이 나기 때문이죠
오늘밤에도 달의 등짐에 편지를 끼워넣어요 달빛이 시린 까닭은 달의 어깨 너머에 매달린 내 심장, 숯 된 마음이 힘을 놓치기
때문이죠 언제부터 저 달, 텅 빈 내 가슴의 돌우물을 긁어댔을까요 쓸리고 닳은 달의 잇몸을 젖은 눈망울로 감싸안아요
물 한 바가지의 서늘함도 조마조마 산에서 내려온 응달의 실뿌리와 돌신발 끌며 하산하는 아린 뒤꿈치 때문이죠
우표만한 창을 내고 이제 낮달이나 올려다봐야겠어요 화장 지운 그대 시린 마음만 조곤조곤 읽어야겠어요
쓰라린 그대 돌우물도 내 가슴 쪽으로 기울고 있으니까요 *
* 이정록시집[정말]-창비
* 낮달 - 이정록
정월 대보름도 달포나 지난 심심한 사랑방
막걸리 자국 희미한 소가죽 북처럼
빈둥빈둥
시부모 병수발로 꼬박 여섯 해나 숯불 받아 먹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호강에 겨워
이태째 삐딱하게 누워 있는
마루 밑 약탕기처럼 *
* 이정록시집[정말]-창비
* 달의 뒤편 - 장옥관
등 긁을 때 아무리 용 써도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읽을 수는 있어도 발음할 수 없는 시니피앙 ‘어’와 ‘으’, 달의 뒤편이다 천수관음처럼 손바닥에 눈알 붙이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내 얼굴, 달의 뒤편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꼬챙이에 꿰어 돌려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더듬이 떼고 날개 떼어 구워 먹을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것, 내 눈동자의 뒤편이다. *
* 그믐 눈썹 -K에게 - 장석주
해가 구르듯 지고 바람은 대숲 아래서 가벼이 목례를 하네요 고양이는 푸른 인광을 번뜩이며 하얗게 울고요 자꾸 울고요 숯이라도 내 마음 탄 자리를 검다 하지는 못하겠죠 물은 물속 일을 모르고 꿈은 제가 꿈인 줄도 모르죠 그러고 살았죠 단풍나무 뒤에 서 있는 당신 어깨 너머로 계절 몇 개가 떨어져요 당신 눈 위에 눈썹은 검고요 당신은 통영을 간다 하네요 발톱 가진 어둠 몇 마리가 철통(漆桶) 속에서 울부짖죠 무슨 일인가요 당신 눈동자를 보던 내 동공은 녹아 눈물로 흐르고 당신에게 뻗던 내 팔은 풀밭에 떨어져 푸른 뱀이 되어 스으윽 가을 건너 봄의 관목 숲으로 사라져요 피비린내가 훅 하고 끼치는 걸 보니 벌써 그믐이 가까워지나 봐요 당신이 내게 기르라고 맡기고 내가 젖동냥해서 기른 그믐이죠 어서 오세요 그믐 눈썹으로 오세요 열두 마리 고양이는 하앟게 울고요 그믐에 그을리고 탄 제 마음 자리는 숯이랍니다 *
* 장석주시집[몽해항로]-민음사
* 달을 보며 - 한용운
달은 밝고 당신이 하도 기루었습니다.
자던 옷을 고쳐 입고, 뜰에 나와 퍼지르고 앉아서, 달을 한참 보았습니다.
달은 차차차 당신의 얼굴이 되더니 넓은 이마, 둥근 코, 아름다운 수염이 역력히 보입니다.
간 해에는 당신의 얼굴이 달로 보이더니, 오늘 밤에는 달이 당신의 얼굴이 됩니다.
당신의 얼굴이 달이기에 나의 얼굴도 달이 되었습니다.
나의 얼굴은 그믐달이 된 줄을 당신이 아십니까.
아아 당신의 얼굴이 달이기에 나의 얼굴도 달이 되었습니다. *
* 양병호저[그리운 詩, 여행에서 만나다]-박이정
* 이화에 월백하고 - 이조년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 月夜於池上作 -달이 있는 연못 - 李建昌
月好不能宿 - 월호불능숙 出門臨小塘 - 출문임소당
荷花寂已盡 - 하화적이진 惟我能聞香 - 유아능문향
風吹荷葉飜 - 풍취하엽번 水底一星出 - 수저이성출
我欲手探之 - 아욕수탐지 綠波寒浸骨 - 녹파한침골
달빛이 좋아 잠 못 이루어 문을 나서 작은 연못으로 나갔지
연꽃은 고요하여 이미 졌으련만 나는 그래도 향기 맡을 수 있네
바람 불어 연잎 뒤치니 물밑에 나타난 별 하나
내 그것을 만지려 하니 파란 물결 찬 기운 뼛속에 스미네
* 부벽루(浮碧樓) - 이색
昨過永明寺 - 작과영명사 -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 - 잠등부벽루 -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 - 성공월일편 -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 떠 있고
石老雲千秋 - 석로운천추 - 늙은 바위 위로 천년의 구름이 흐르네.
麟馬去不返 - 인마거불반 -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으니
天孫何處遊 - 천손하처유 -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長嘯倚風磴 - 장소의풍등 - 돌다리에 기대어 휘파람 부노라니
山靑江自流 - 산청강자류 -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
* 보월(步月) -달빛 아래를 거닐며 - 문동(文同)[송]
掩卷下中庭 月色浩如水
秋氣凉滿襟 松陰密鋪地
白蟲催夜去 一雁領寒起
靜念忘世紛 誰同此佳味
책을 덮고 앞뜰로 내려서니 달빛이 물처럼 넓고 크다.
가을 기운은 가슴을 서늘하게 채우고 소나무 그림자는 짙게 땅에 깔려 있다.
온갖 가을벌레는 밤을 재촉하여 떠나 보내고 한 마리 기러기를 보니 겨울이 오는 것을 아네.
조용히 상념에 젖어 세속의 일을 잊으니 누가 이 풍치를 함께할까?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 5]-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