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슬픔 시 모음

효림♡ 2011. 8. 3. 08:40

* 내 슬픔 어찌 네 슬픔보다 크다 하랴 - 도종환 

내 슬픔 어찌 네 슬픔보다 크다 하랴

내 아픔 어찌 네 아픔보다 크다 하랴

나도 눈물 많은 세상을 살아오긴 했지만

꺾어진 뼈 그대로 잘라진 살 그대로

한많은 반생을 그늘진 이들의 벗이 되어 살다 간

네 아비의 이웃의 형제의 삶 앞에

짧은 세상 지울 수 없는 한을 지고 살아야 하는 너희들 앞에

어찌 내 슬픔만을 크다 하랴

어찌 내 아픔이 정녕 네 아픔보다 크다 하랴 *

* 도종환시집[내가 사랑하는 당신은]-실천문학사

 

* 슬픔에게 - 도종환 

슬픔이여 오늘은 가만히 있어라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땅을 치며 울던 대숲도
오늘은 묵언으로 있지 않느냐
탄식이여 네 깊은 속으로
한 발만 더 내려가
깃발을 내리고 있어라 오늘은
나는 네게 기약 없는
인내를 구하려는 게 아니다
더 깊고 캄캄한 곳에서 삭고 삭아
다른 빛깔 다른 맛이 된 슬픔을
기다리는 것이다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더딘 슬픔 - 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

 

* 마지막 기차 - 오장환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찢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路線)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

* 천양희[시의 숲을 거닐다]-샘터

 

*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

 

* 깨끗한 슬픔 - 정일근 
작은 마당 하나 가질 수 있다면
키 작은 목련 한 그루 심고 싶네
그리운 사월 목련이 등불 켜는 밤이 오면
그 등불 아래서 그 시인의 시 읽고 싶네
꽃 피고 지는 슬픔에도 눈물 흘리고 싶네
이 세상 가장 깨끗한 슬픔에 등불 켜고 싶은 봄밤
내 혼에 등불 밝히고 싶은 봄밤

 

*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 이재무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


* 슬플 때는 - 오순택 
꽃이 없다고 나비는 슬퍼하지 않는단다.
개미는 바빠서 슬퍼할 겨를이 없단다.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을 따서
가슴 가득 채워 봐.
슬플 때는.

그래도 슬플 땐
들꽃을 만나 봐.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아도
웃고 있지 않니.

그러면
가슴속에 들어 있는 슬픔이
채송화 꽃씨같이 토옥 튀어 나와
동글동글 굴러가 버릴 거야. *

* 오순택동시집[아기염소가 웃는 까닭]-청개구리

 

* 오래된 슬픔 하나 - 이향아

오래된 술이 향기롭다는 말 향기롭다

오래된 친구가 편하다는 말 참 편하다

 

그게 보통 일인가, 참아야 되는

그게 쉬운 일인가, 기다려야 하는

 

오래오래 아프고 오래오래 굶어서

오래오래 까마득히 몰라야 하는

 

너냐 내냐 잊어버려 검은 땅에 묻고

너냐 내냐 귀 막고 어지럼증에 떠서

둘 중에 하나가 죽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가 손들고 나가

아니요, 납니다 자수를 하든지

 

엄동설한 맨발로 묶여가든지

그렇게 사그라져 돋아나야 하는

그랬다가 느닷없이 복받쳐야 하는

 

복받쳐 통곡하다 뚝 그쳐야 하는

그러기를 천만 번씩 다시 해야 하는

오래되어 빛 바랜 희망이 하나

오래되어 보석이 된 슬픔 하나 있다

 

* 슬픔에 대하여 - 복효근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追憶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

 

* 상류로 거슬러오르는 물고기떼처럼 - 이성복

슬픔이 끝나지 않고 슬픔이라면

그는 또 물 속의 풀잎처럼 살 것이다

오후의 햇빛은 흐르는 물을 푸른 풀밭으로 바꾸고

흐름이 끝나는 데서 물은 머무는 그림자를 버린다

 

상류로 거슬러오르는 물고기떼처럼

그는 그의 몸짓이 슬픔을 넘어서려는 것을 안다

모든 몸부림이 빛나는 정지(靜止)를 이루기 위한 것임을 * 

 

* 슬픈 노래 - 이해인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죽음을

아직 다 슬퍼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슬픔 위에 포개져

나는 할 말을 잃네

나는 이제 울 수도 없네

갈수록 쌓여가는 슬픔을

어쩌지 못해

삶은 자꾸 무거워지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랑하는 이들

세월이 가도 문득 문득

그리움으로 살아오는 하얀 슬픔이

그래도 조그만 기쁨인가 나를 위로하네 *

 

* 슬픔을 위하여 - 정호승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

 

*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 정현종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
낄낄거릴 것도 없고
너무 배부를 것도 없고,
안다고 알았다고
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
누구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
엉엉 울 것도 없다
뭐든지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
풀처럼 흔들리고 있거나
그 어떤 모습이거나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

 

* 슬픔이 나를 깨운다 -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 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 치면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

* 류시화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 자작나무 여자 - 최창균

그의 슬픔이 걷는다
슬픔이 아주 긴 종아리의 그,
먼 계곡에서 물 길어올리는지
저물녘 자작나무숲
더욱더 하얘진 종아리 걸어가고 걸어온다
그가 인 물동이 찔끔,
저 엎질러지는 생각이 자욱 종아리 적신다
웃자라는 생각을 다 걷지 못하는
종아리의 슬픔이 너무나 눈부실 때
그도 검은 땅 털썩 주저앉고 싶었을 게다
생의 횃대에 아주 오르고 싶었을 게다
참았던 숲살이 벗어나기 위해
또는 흰 새가 나는 달빛의 길을 걸어는 보려
하얀 침묵의 껍질 한꺼풀씩 벗기는,
그도 누군가에게 기대어보듯 종아리 올려놓은 밤
거기 외려 잠들지 못하는 어둠
그의 종아리께 환하게 먹기름으로 탄다
그래, 그래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종아리가 슬픈 여자,
그 흰 종아리의 슬픔이 다시 길게 걷는다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

 

* 할렘 강 환상곡 - 랭스턴 휴즈  

새벽 두 시 홀로
강으로 내려가 본 일이 있는가
강가에 앉아
버림 받은 기분에 젖은 일이 있는가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이미 작고하신 어머니 신이여 축복하소서
연인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 여자 태어나지 말았었기를 바란 일이 있는가  

할렘 강으로의 나들이
새벽 두 시 한밤중

나 홀로
하느님 나, 죽고만 싶어  

하지만 나 죽은들 누가 서운해할까 *

* 천양희[시의 숲을 거닐다]-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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