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월의 시 - 함형수
하늘 끝없이 멀어지고
물 한없이 차 지고
그 여인 고개 숙이고 수심(愁心)지는 구월.
기러기떼 하늘가에 사라지고
가을 잎 빛 없고
그 여인의 새하얀 얼굴 더욱 창백하다.
눈물 어리는 구월.
구월의 풍경은 애처로운 한 편의 시(詩).
그 여인은 나의 가슴에 파묻혀 우다 *
* 9월이 - 나태주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너는
내 가슴속에 들어와 익는다.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서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너는
내 가슴속을 떠나야 한다 *
* 나태주시집[추억의 묶음]-미래사
* 다시 9월이 - 나태주
가야 할 시간
* 9월 - 오세영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 9월 - 문인수
무슨 일인가, 대낮 한 차례
폭염의 잔류부대가 마당에 집결하고 있다.
며칠째, 어디론가 계속 철수하고 있다.
그것이 차츰 소규모다.
버려진 군용 텐트나 여자들같이
호박넝쿨의 저 찢어져 망한 이파리들
먼지 뒤집어쓴 채 너풀거리다
밤에 떠나는 기러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몇몇 집들이 더 돌아와서
또, 한 세상 창문이 여닫힌다.
* 유등연지 - 문인수
9월 유등마을 연지엔 연잎들이 모두 나와 물을 덮고 있다. 누가 풀섶에 빛 바랜 운동화 한 컬례를
가지런히 벗어놓았다. 저런, 낡은 죽음의 이미지조차도 이쁜 꼬리지느러미를 달고 짧게 사라진다.
배고프다 문득, 연잎에 이는 한바탕 소나기 소리가, 그런 바람의 비늘이, 달빛 냄새가 궁금하다.
아, 꽃 지고도 많이 남은 초록 날짜들이 남몰래 빨아먹는 슬픔이 있다. *
* 9월의 약속 - 오광수
산이 그냥 산이지 않고
바람이 그냥 바람이 아니라
너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에서,
약속이 되고 소망이 되면
떡갈나무잎으로 커다란 얼굴을 만들어
우리는 서로서로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보자
손내밀면 잡을만한 거리까지도 좋고
팔을 쭉 내밀어 서로 어깨에 손을 얹어도 좋을거야
가슴을 환히 드러내면 알지 못했던 진실 힘들어
너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에서
산울림이 되고 아름다운 정열이 되고
우리는 곱고 아름다운 사랑들을 맘껏 눈에 담겠지
우리 손잡자
아름다운 사랑을 원하는 우리는
9월이 만들어놓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약속이 소망으로 열매가 되고
산울림이 가슴에서 잔잔한 울림이 되어
하늘 가득히 피어오를 변치않는 하나를 위해!
*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 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9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 9월 - 고영민
그리고 9월이 왔다
산구절초의 아홉 마디 위에 꽃이 사뿐히 얹혀져 있었다
수로(水路)를 따라 물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누군지 모를 당신들 생각으로
꼬박 하루를 다 보냈다
햇살 곳곳에 어제 없던 그늘이 박혀 있었다
이맘때부터 왜 물은 깊어질까
산은 멀어지고 생각은 더 골똘해지고
돌의 맥박은 빨라질까
나무에 등을 붙이고 서서
문득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왕버들 아래 무심히 앉아
더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저녁이 와
내 손끝 검은 심지에 불을 붙이자
환하게 빛났다
자꾸만 입안에 침이 고였다
여름의 효능은 어언 감소되었다
바람의 손길이 부드러워 토양을 만지고
갈대가 줄지어 서서 구름을 쓸어보낸다
기약없이 물총새는 남천으로 날아갔지만
이제 따스한 귀인이 온다
가고 없는 빈 자리에
허약한 구절초는 누구를 만나자는 것이냐
쓰러지기엔 기다림이 남은
가냘픈 몸매가 돌아올 인기척에 귀 기울인다
가을엔 이름을 호명해서는 안 된다
이름을 호명하면 모든 물상이 울어버린다
인생의 구조가 삶의 소득과 부딪히는 시간
귀인이 손에 선물을 안고 온다
저걸 그냥 받아먹을 수만 있겠는가
나는 보태 줄 것이 없다
물소리는 자신을 태초의 소리로 읊조리니
낮은 자리의 음표로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
오랜 과거사가 다 몰려와 지금 흐느끼는 야성
피곤한 방랑자가 떠나면
나는 방랑자의 뒷모습을 투명하게 보리라
미목이 수려한 여인이 내 앞을 지나간다
저 청보리 같은 하늘을 그대가 다 가져도 좋다
내가 그대에게 무료로 주겠으니 *
*2008 월간문학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