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유안진 시 모음 2

효림♡ 2011. 9. 5. 08:44

* 오만과 편견 - 유안진  

불빛 한 점이 마주 오고 있다

충돌위험에 경고신호를 보내도 막무가내이다

무전을 쳤다 "10도 우향하라"

응답이 왔다 "10도 좌향하라"

함장은 다시 쳤다 "나는 대령이다 명령에 따르라"

응답이 또 왔다 "나는 일병이다 지시에 따르라"

기가 찬 함장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여긴 군함이다. 명령 무시하면 박살난다"

응답이 다시 왔다

"여긴 고장난 등대다. 지시 무시하면 박살난다" *

 

* 벌초, 하지 말 걸

떼풀 사이사이

패랭이 개밥풀 도깨비바늘들

방아깨비 풀여치 귀뚜라미 찌르레기 소리도

그치지 않았는데

살과 뼈 녹여 키우셨을 텐데

 

다 쫓아 버렸구나

어머니 혼자

적적하시겠구나. *

 

* 손부터 보여 드려라 

병상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던 소녀가 먼저 죽게 되었다// 

성사聖事 오신 신부에게 소녀가 고백했다// 

주일미사는 늘 빠졌고, 기도도 눈감자마자 잠들어버리곤 했습니다// 

신부는 소녀의 손을 잡았다. 나무껍질 같고 막돌멩이 같았다// 

괜찮다 얘야, 하느님께는 네 손부터 보여 드리거라. * 

* 고준석 신부의 "아기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 참고, 서울주보, 2011년 1월 2일

 

* 말궁합

시인 김삿갓에게는 썩은 고지바가지에 탁배기가

시인 김병연金炳淵 씨에게는 이 빠진 막사발에 막걸리가

시인 난고蘭皐 선생께는 금이 간 사기잔에 약주가

어울릴 것 같아 *

 

* 멘토스

짐값 안 받으니 내려놓고 편히 앉아 가세요

보따리를 이고 앉은 할머니에게 버스기사가 말했다

공짜로 탔는디 보따리꺼정이라, 안 되제

 

오른빰을 치거든 왼빰까지 돌려대라 하셨잖아

엉망으로 얻어터진 아이를 엄마가 나무랐다

그 형은 왼팔이 짧아 늘 왼빰부터 때린단 말예요

 

정화수는 한 대접만 올리는 거다

장독대에 대접 두 개를 본 시어머니가 베트남 자부에게 일러줬다

내일 밤엔 비 온데서 내일 몫까지예요

하룻밤에 두 번 목욕하시면 달님도 감기 드신다. *

 

* 가을역

사랑은 떠나고 사람만 있다

귀뚜라미 목청 몇 옥타브 올라갔고

밤하늘 젖은 별들 또랑또랑 영글고

까실까실 바람끝도 날을 세운다 

 

어둠으로 무르익은 여름밤 사랑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변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냄과 떠남을 구태여 구별 말자

네가 가지 않았다면 나를 보냈을 게다. *

 

* 아무도 안 보는 곳

수도원장이 한 수도사만 편애했다. 다들 불만을 토로했지만, 원장신부는 오히려 당당했고,

'그 까닭'을 알고 싶다고 요구하자, 식당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사과 한 광주리를 끌고 온 원장은, 한 개씩 나눠주며 아무도 안 보는 데 가서 먹고, 사과 속 승텡이를 갖고 오라고 했다.

다들 사과 개씩을 들고 나가서 먹고 돌아와 자리에 앉았는데, 원장이 편애하는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나타난 그의 손에는 사과가 그대로 들려 있지 않는가.

원장신부가 물었다 "형제는 왜 그대로 가져 왔오?"

그가 대답했다 "아무도 안 보는 데가 아무데도 없어서요"

만족한 표정의 원장신부가 힘줘 말했다.

"내가 저 형제를 편애하는 까닭을 알겠지요?" *

 

* 아직도 꿈꾼다

바다로 떠나는 새끼연어들을 새끼붕어들도 뒤따라간다// 

기러기 떼와 함께 까치 몇 마리도 시베리아로 떠난다 피서를 즐기려고// 

제비 한 마리가 참새들과 나란히 전깃줄에 앉아 가을볕을 쬔다 텃새가 되려고// 

서리 허연 가지 사이 개나리 철쭉꽃이 드문드문 피었다 겨울꽃이 되려고// 

가마우지 새는 물 속을 헤엄치고 싶어했고

날개를 꿈꾸던 다람쥐는 하늘다람쥐가 되었으니까. * 

 

* 유안진시집[둥근 세모꼴]-서정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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