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귀뚜라미 시 모음

효림♡ 2011. 8. 30. 09:16

* 귀뚜라미 - 김소월

산(山)바람 소리 찬비 듣는 소리

그대가 세상 고락(苦樂) 말하는 날 밤에  

숫막집 불도 지고 귀뚜라미 울어라 *

 

* 귀뚜라미 - 구상    
立冬도 지난 어느 날 밤
한잠에서 깨어나니
창 밖 뜰 어디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저 소리는 운다[鳴]기보다
목숨을 깎고 저미는 소리랄까?
쇠잔한 목숨의 신음소리랄까!

문득 그 소리가
내 가슴속에서도 울려온다
내 가슴속 어느 구석에도
귀뚜라미가 숨어사나 보다

머지않을 나의 죽음이 떠오른다
이즈막 나의 시가 떠오른다 

 

*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 나희덕시집[그 말이 잎을 물들었다]-창비

 

* 귀뚜라미 - 홍해리    
저 놈은
무슨 심사로
어쩌자고
밤새도록 날새도록
목을 놓아
남의 잠을 끌어다
별로 띄울까
단풍잎 지는 소리
이슬 듣는 소리에
천지가 더욱 넓구나
한잔 술 앞에 하고
혼자 취하니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저 울음소리.....
목에 밟히고
가슴에 쌓이는
별 지는 소리 

 

* 우물 - 박형권  
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언제 한번 귀뚜라미 초대하여
발 뻗고 눕게 하고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오늘 밤에는
귀뚜라미로 변신하여
가을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봐야겠다 *

 

* 귀뚜라미 - 최승호 

라미 라미

맨드라미

라미 라미

쓰르라미

맨드라미 지고

귀뚜라미 우네

 

가을이라고

가을이 왔다고 우네

라미 라미

동그라미

동그란

보름달 *

 

* 시인과 귀뚜라미 - 정일남 

귀뚜라미와 시인이 어느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가을밤 귀뚜라미와 시인은 서로 만나기로 했습니다
달이 밝거나 뜰에 꽃잎 몇 개 떨어지는 분위기면
서로가 좋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귀뚜라미는 손질한 악기를 등에 메고
시인의 오두막을 방문 했습니다
달이 밝았으며 뜰 가엔 꽃잎도 지는 밤
그러나 가슴앓이 시인은 없었습니다
밤을 새워 기다려도 꽃잎만 질 뿐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귀뚜라미는 전화벨만 울리며 떠돌았습니다

 

* 귀뚜라미 - 이효녕 
지난 밤 누가
내 가슴에 귀뚜라미를 한 마리 보냈는가
풀잎 위로 스치던 바람인가 
한번 만나도 추억이 되는 달빛의 그림자인가
눈감아도 유유히 흘러가는 사랑의 노래인가
깊어진 밤에 쏟아지는 달빛
너는 어찌하여 귀뚜라미를 데리고
그리움이 잘린 가을을 만나
이리도 멀리 내게 찾아왔는가 *

 

* 귀뚜라미 - 김성춘  

우주의 오솔길에

저 조그맣고 이쁜 우주선,

네 몸에

별 부스러기 찌륵찌륵 묻어있다.

 

* 귀뚜라미 - 송재진 

어쩌면 똑 닮았다,

그 머슴애 목소리.

 

일껏 불러 놓곤

돌아보면 시치미 뚝!

 

새도록

들랑이는 목소리

문지방이 닳는다.


* 귀뚜라미 - 황동규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
어제는 뒤꼍 다용도실에서 울었다.
다소 힘없이.
무엇이 그를 그 곳으로 이사 가게 했을까.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
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
아니면 날아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
천천히 걸어 거실을 건넜으리라 상상해 본다.
우선 텔레비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
저녁마다 집 안에 사는 생물과 가구의 얼굴에
한참씩 이상한 빛 던지던 기계.
한번 날아올라 예민한 촉각으로
매끄러운 브라운관 표면을 만져 보려 했을 것이다.
아 눈이 어두워졌다!
손 헛짚고 떨어지듯 착륙하여
깔개 위에서 귀뚜라미잠을 한숨 잤을 것이다.
그리곤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엌으로 들어가
바닥에 흘린 찻물 마른 자리 핥아 보고
뒤돌아보며 고개 두어 번 끄덕이고
문턱을 넘어
다용도실로 들어섰을 것이다.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으로......

......오늘은 그의 소리가 없다. *

* 황동규시집[미시령 큰 바람]-문학과지성사,2000

 

* 귀뚜라미 - 도종환

   밤을 새워 우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던 날이 있었다 나의 노래는 나의 울음 남들은 내 노래 서늘하다 했지만 나는 처절하였다 

느릅나무 잎은 시나브로 초록을 지워가는데 구석지고 눅눅한 곳에서 이렇게 스러져갈 순 없어서 나의 노래는 밤새도록 울음이었다 어떤 날은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어서 어떤 날은 어디에도 몸 깃들일 곳 없어서 밤마다 내 영혼 비에 젖어 허공을 떠돌았고 떠도는 동안 흥건한 울음이 생의 굽이 많은 시간을 적시곤 했다 남들이 눈물로 읽은 시는 울면서 혼자 부른 노래였다 가을이 저 혼자 아래로 아래로 몸을 내리는 뜨락에 여린 몸을 부르르 떨며 귀뚜라미 우는데 너는 왜 이제 울지 않느냐고 물으며 왜 온몸으로 울지 않느냐고 네가 그렇게 찾던 이름 왜 지금은 부르지 않느냐고 왜 차가운 시간에 맞서지 않느냐고 물으며 귀뚜라미는 우는데 *

 

* 봄밤의 귀뚜리 - 이형기  
봄밤에도 귀뚜리가 우는 것일까. 
봄밤, 그러나 우리 집 부엌에선 
귀뚜리처럼 우는 벌레가 있다.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아무튼 제철은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목청껏 우는 벌레. 
생명은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열심히 울고 
또 열심히 열심히 사는 당당한 긍지, 
아아 하늘 같다. 
하늘의 뜻이다. 
봄밤 자정에 하늘까지 울린다. 
귀를 기울여라. 
태고의 원시림을 마구 흔드는 
메아리 쩡쩡, 
메아리 쩡쩡 
서울 도심의 숲 솟은 고층가 
그것은 원시에서 현대까지를 
열심히 당당하게 혼자서도 운다. 
목청껏 하늘의 뜻을 
아아 하늘만큼 크게 운다.  

*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 안도현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찬 고요속에다 실금을 그어 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 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

* 안도현시집[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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