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방문객 - 정현종

효림♡ 2011. 9. 26. 08:52

*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ㅡ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 정현종시집[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

 

* 꽃시간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 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 * 

 

* 사랑은 나의 권력 -페테르부르크 2 

먼지 가득한 한 소극장에서 
나움 코르자빈이란 사람의 
[사랑에 대하여]를 보았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배우 윗호주머니에 꽂은 장미뿐, 
츠베타예바와 보즈네센스키와 
그런 시인들의 시로 구성한 대사들에서 
한 구절이 꽃피었다고 
내 사랑 내 귀에 속삭였네 
"사랑은 나의 권력"  
나는 내 사랑의 귀에 속삭이네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사랑이여 
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

* 정현종시집[갈증이며 샘물인]-문지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

 

* 그립다고 말했다

두루 그립다고

너는 말했다.

그러자 너는

꽃이 되었다.

 

그립다는 말

세상을 떠돌아

나도 같이 떠돌아

가는 데마다

꽃이 피었다.

닿는 것마다

꽃이 되었다.

 

그리운 마음

허공과 같으니

그 기운 막막히 퍼져

퍼지고 퍼져

마음도 허공도

한 꽃송이!

 

두루 그립다고

너는 말했다. *

 

* 물소리

한 여름 점심 때

옻 술을 마신다

넘어가는구나

목으로 넘어 가는구나

계곡 물소리를 내며

 

* 화음

그대 불붙는 눈썹 속에서 일광(日光) 

은 저의 머나먼 항해(航海)를 접고

화염(火焰)은 타올라 용약(踊躍)의 발끝은 당당히

내려오는 별빛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달려간다.

그대 발바닥의 화조(火鳥)들은 끽끽거리며

수풀의 침상(寢床)에 상심(傷心)하는 제.

 

나는 그동안 뜨락에 가안(家雁)을 키웠으니

그 울음이 내 아침의 꿈을 적시고

뒤뚱거리며 가브리엘에게 갈 적에

시간(時間)은 문득 곤두서 단면(斷面)을 보이며

물소리처럼 시원한 내 뼈들의 풍산(風散)을 보았다.

 

그 뒤에 댕기는 음식(飮食)과 어둠은

왼 바다의 고기떼처럼 살 속에서 놀아

아픔으로 환히 밝기도 하며 

오감(五感)의 현금(弦琴)들은 타오르고 떨리어

아픈 혼(魂)만큼이나 싸움을 익혀 가느니.

 

그대가 숨긴 극치(極致)의 웃음 속에

지금 다시 좋은 일이 더 있을리야

그대의 질주(疾走)에 대해 궁금하고 궁금한 그 외에는

그대가 끊임없이 마루짱에서 새들을 꺼내듯이

살이 뿜고 있는 빛의 갑옷의

그대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망명(亡命)하고 싶은 그 외에는.

 

* 무지개 나라의 물방울

물방울들은 마침내
비껴오는 햇빛에 취해
공중에서 가장 좋은 색채를
빛나게 입고 있는가.
낮은 데로 떨어질 운명을 잊어버리기를
마치 우리가 마침내
기징 낮은 어둔 땅으로
떨어질 일을 잊어버리며 있듯이
자기의 색채에 취해 물방울들은
연애와 무모에 취해
알코올에, 피의 속도에
어리석음과 시간에 취해 물방울들은
떠 있는 것인가.
악마의 정열 또는
천사의 정열 사이의
걸려 있는 다채로운 물방울들은. *

 

* 경청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

* 정현종시집[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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