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물의 노래 - 이동순

효림♡ 2011. 9. 30. 22:27

* 서흥 김씨 내간(內簡) -아들에게 - 이동순 
그해 피난가서 내가 너를 낳았고나
먹을 것도 없어 날감자나 깎아 먹고  
산후구완을 못해 부황이 들었단다
산지기집 봉당에 멍석 깔고
너는 내 옆에 누워 죽어라고 울었다
그해 여름 삼복의 산골
너의 형들은 난리의 뜻도 모르고
밤나무 그늘에 모여 공깃돌을 만지다가
공중을 날아가는 포성에 놀라
움막으로 쫓겨와서 나를 부를 때
우리 출이 어린 너의 두 귀를 부여안고
숨죽이며 울던 일이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네 아비는 빈 마을로 내려가서
인민군이 쏘아죽인 누렁이를 메고 왔다
언제나 사립문에서 꼬릴 내젓던
이제는 피에 젖어 늘어진 누렁이
우리 식구는 눈물로 그것을 끓여 먹고
끝까지 살아서 좋은 세상 보고 가자며
말끝을 흐리던 늙은 네 아비
일본 구주로 돈벌러 가서
남의 땅 부두에서 등짐 지고 모은 품삯
돌아와 한밭보에 논마지기 장만하고
하루종일 축대쌓기를 낙으로 삼던 네 아비
아직도 근력좋게 잘 계시느냐
우리가 살던 지동댁 그 빈 집터에

앵두꽃은 피어서 흐드러지고
네가 태어난 산골에 봄이 왔구나
아이구 피난 피난 말도 말아라
대포소리 기관포소리 말도 말아라
우리 모자가 함께 흘린 그해의 땀방울들이
지금 이 나라의 산수유꽃으로 피어나서
그 향내 바람에 실려와 잠든 나를 깨우니
출아 출아 내 늬가 보고접어 못 견디겠다
행여나 자란 너를 만난다 한들
네가 이 어미를 몰라보면 어떻게 할꼬
무덤 속에서 어미 쓰노라 *

 

* 담타령 

담아담아 온갖 담아 거기 서서 무얼 막노

바닷물을 막았으니 해변가엔 방파제요

여름 홍수 막으려고 시냇가엔 방죽이라

김장밭에 들어가는 개닭 막는 개바자요 

나뭇가지 엮어 만든 저 울타린 굽바자라

달풀로 얽었으니 얼기설기 달바자요

수수깡 갈대풀로 촘촘하니 울바자라

대로 엮은 대울타리 돌로 쌓은 돌담이요

흙돌 반죽 돌죽담에 꽃수놓은 예쁜 꽃담

깨진 기와 담에 박은 디새죽담 보기 좋네

돌멩이를 배 맞추어 마주 쌓은 맞담이요

석비레로 쌓았으니 이름조차 석비레담

담벽 아랜 수북하게 돌무더기 밑뿌리요

작은 돌을 포갰으니 보말담이 그것이라

자갈돌을 쓸어모아 차곡차곡 사스락담

일년 농사 물 대주는 보를 막아 봇둑일세 

탱자 두릅 심었으니 산뜻하다 산 울타리

뽕나무가 울이 되자 울뽕나무 멋스럽네

빈터를 에워싸서 쓸쓸하다 빈담이요 

사방겹겹 빙 둘러쳐 답답하다 엔담이라

함석으로 높이 세운 붉게 녹슨 저 양철

한번 가면 다시 못 볼 교도소라 벽돌담아

내 땅 속의 남의 땅 된 미군부대 꼬부랑담

담 중에도 가장 흉한 가시쇠줄 철조망담

남북간 영호남에 서로 막는 쌀쌀한 담

이 담 이 담 다 허물고 웃음소리 만나보세 *

 

* 양말

양말을 빨아 널어 두고

이틀 만에 걷었는데 걷다가 보니

아, 글쎄

 웬 풀벌레인지 세상에

겨울 내내 지낼 자기 집을 양말 위에다

지어놓았지 뭡니까

참 생각 없는 벌레입니다

하기사 벌레가 양말 따위를 알 리가 없겠지요

양말이 뭔지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집짓기가 급해서 이것저것 돌볼 틈이 없었겠지요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양말을 신으려고 무심코 벌레집을 떼어 내려다가

작은 집 속에서 깊이 잠든

벌레의 겨울잠이 다칠까 염려되어

나는 내년 봄까지

그 양말을 벽에 고이 걸어 두기로 했습니다 *

* 이동순시집[가시연꽃]-창비

 

* 개밥풀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 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

* 이동순시집[개밥풀]-창비

 

* 一字一淚

모든 눈들은 산맥 저편으로도 내리고 싶었다
언제였던가 가본 적이 있는 듯한
그러나 지금은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그곳은 이목구비가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산설고 물설은 타관이 아니었다
송이송이 뜨거운 눈물을 주먹으로 씻어내며
눈은 간신히 기슭에 올라 지척의 앞을 보았다
그리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몸은 지치고 마음만 급하였다
행여 바람에 실려 산을 넘을 듯하였으나
그의 온몸은 중턱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눈 위로 또 다른 눈이 퍼부었다
죽어서도 눈은 산맥 저편으로 내리고 싶었다
묵묵히 긴 밤을 지새운 아침
사람들은 차디찬 길바닥에 깔린 눈을 보았다
아무도 눈이 왜 거기 와 있는가를 말하지 않았다 *

* 이동순시집[개밥풀]-창비

 

* 물의 노래 -'새도 옮겨앉는 곳마다 깃털이 빠지는데'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죽어 물이나 되어서 천천히 돌아가리
돌아가 고향하늘에 맺힌 물 되어 흐르며
예섰던 우물가 대추나무에도 휘감기리
살던 집 문고리도 온몸으로 흔들어보리
살아생전 영영 돌아가지 못함이라
오늘도 물가에서 잠긴 언덕 바라보고
밤마다 꿈을 덮치는 물꿈에 가위 눌리니
세상사람 우릴 보고 수몰민이라 한다
옮겨간 낯선 곳에 눈물 뿌려 기심매고
거친 땅에 솟은 자갈돌 먼곳으로 던져가며
다시 살아보려 바둥거리는 깨진 무릎으로
구석에 서성이던 우리들 노래 물 속에 묻혔으니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불러보아도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만 나루터에 쌓여갈 뿐
나는 수몰민, 뿌리째 뽑혀 던져진 사람
마을아 억센 풀아 무너진 흙담들아
언젠가 돌아가리라 너희들 물 틈으로
나 또한 한많은 물방울 되어 세상길 흘러흘러
돌아가 고향하늘에 홀로 글썽이리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 2]-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