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자작나무 시 모음

효림♡ 2011. 10. 14. 08:24

* 자작나무 - 류시화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사라은 침묵이다

자작나무를 바라보면
이미 내 어린 시절은 끝나고 없다

이제 내 귀에 시의
마지막 연이 들린다 내 말은
나에게 되돌아 울려오지 않고 내 혀는
구제받지 못했다 *

* 류시화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 자작나무 - 도종환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

 

*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

 

*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새순 소록소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가랑잎 우수수 지리


그런데 만약에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거기에다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

 

* 자작나무 - 양진건

자작나무는 알고 있을까?

왜 우리는 모든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건지,

바람에 몸을 기댄 채

우수수 나뭇잎을 떠나보내듯

때가 되면

서글프지만 왜 우리는 뒤척이며 헤어져야 하는 건지

 

자작나무는 알고 있을까?

그것들이 비록 슬픈 몸짓으로 떠나지만,

때가 되면

다시는 누구도 만나지 않을 것처럼

그것들은 떠나지만

왜 우리는 많은 밤을 지나 다시 만나야 하는지,

우리는 증거하는 것이 비록 고통뿐이어도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지

 

그래서 슬픔과 기쁨은

불륜처럼 함께 하는 것이지만

외로웠으므로 그래서

내 가슴은 다시 뜨거워지는 것인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그대여.

돌아보면 언제나 나는 돌아오고 있을테니

헤어진 것과 헤어지는 것들 틈에서

그토록 바스락거리는 자작나무처럼

비로소 귀 열고

목 뻗어, 오늘도 나를 기다려주오.

 

*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嫩葉)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 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 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누구네의 어린 외동딸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한다 * 

 

* 백화(白樺) -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山)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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