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운사 동구 - 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
* 구름경 -선운차운(禪雲次韻) - 정현종
1.
여기 세상이여
구름이 경(經)이네.
아침 저녁
구름을 읽네.
2.
구름 없는 날은
노는 날,
문자 없으니
노는 날.
귀하고 귀하구나
마음 노는 날! *
* 선운사 점묘 - 서정춘
동백숲이 定處다 //
아껴서 듣고 싶은 철새가 운다 //
울다가 그만 둔다//
귓속이 환해진다 //
동백숲 그늘을 치고 동백이 진다 //
할! 맞아 떨어진 點火를 본다 *
* 선운사 기행 - 김화영
선운사 골짜기에서 우두커니 부도를 보며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망간
옛 친구를 생각한다.
그때 나는 돕지 않고 술만 마셨다.
무거운 것 내려놓는다고 술만 마시니
남은 세월 무거운 수레가 되어 등에 매였다.
멈춰 선 수레에 이끼가 파랗다.
도솔암 가는 길에
장사송 앞에 잠시 쉬노라니
지나던 한 젊은이 농담하듯 묻는다
"저 나무를 누가 다 찢어놨죠?"
으스러지게 허공을 껴안겠다고
찢어지게 팔을 벌린 저 큰 소나무
그 위로 구름 한 점 떠있다.
등 뒤에 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끝물의 상사화, 저도 한 번 껴안아 본다고
꽃잎 짝짝 찢다가
파문처럼 빨갛게 입술이 터졌다. *
* 선운사 가는 길 - 고재종
마음의 걷잡을 수 없음을 하늘도 안다는 걸까. 비 뿌리다 해 비추다 다시 거센 바람으로 아직 외투 껴입지 못한
우리를 몰아세우는 날씨를 두고 그녀는 호랭이가 떼로 장가가는 날인갑다고 했다. 사랑 때문에, 정지된 화면처럼
일순 세상이 멎어버리던 시간의 경험을 가진 그녀의 말이 저기 둔덕에 까마득히 꽃사래치는 억새의 울음을 낳은 걸
까. 비산비야를 지나고, 풍천장어를 먹으며, 논에서 살던 것이 먼 필리핀 앞바다로까지 알을 낳으러 가려면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곳에서 적응기간을 거쳐야만 바다로 들어도 심장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그 장어의 생리
를 이야기했다.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빨 으르렁거리는 파도를 만나버린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적응기간을 거
쳐야 하는 것인가. 예의 파도며 비바람이며 으르렁거리는 것 투성이인 만돌리 그 한적한 바닷가에 닿자마자, 선생은
대뜸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는 시구절을 읊어댔는데 귀밑머리가 새하얀 그는 학교 강의도
앗세 작파해버리고 우리를 맞아주었었다. 나이 오십에 아직도 시인지망생이라는 것이 또 수많은 갈매기 울음을 낳
게 했으리라. 그때 세상엔 아직도 따뜻한 사람이 많을 거야 하고 말하곤 크 - 하고 울대를 터뜨려버린 김은 얼른
얼른 늙어버리고 싶은 깨끗한 절망을 아직도 간직한 친구였는데, 나는 그보다는 손이 너무 차거운 그녀에 대한 걱
정으로 마음이 쏠렸고, 그녀는 결국 오소소 떨어대며 내 팔짱을 껴들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한순간 저 앞길에
걸린 찬란한 무지개를 보았지만, 아직도 미궁일 뿐인 하룻길을 안고 저녁 늦게 들어선 선운사 그 적막 속엔 여즉 불
이 밝아 있다는 게 무척 다행스럽게만 생각되었다. 아, 그때 우수수 져내리던 잎새들은 또 무엇이던가. *
* 고백 - 문인수
선운사 동백, 그 상처 붉게 붉게 절며 당도하는 곳,
가마미 바닷가에 한 사내 서 있었네.
가마미 앞바다에 폭설이 내렸네,
폭설이 내렸네, 그렇듯 죄 말하고 나서
저 긴 수평선, 긴 수평선에 걸쳐 오래 자고 있네. *
*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 장석남
국화 허리가 물들어서
정강이는 시들어서
거기 절을 짓고 굴을 파고
향기처럼 소멸을 빌다 보니
동백이 오고 있다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법고 소리,
둥구둥구둥둥둥둥둥 딱 둥둥 둥구 둥둥둥 따기따기 둥둥
국화 정강이 슬퍼서 절을 짓고 빌다보니
동백이 오고 있다
동백 속에 또 절을 짓고 빌어서
국화를 부르리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꽃밭 두드리는
법고 소리, *
* 선운산 도솔암 가는 길 - 김영남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다면
난 그녀와 살림을, 다시 차리겠네
개울이 오묘한 그녀에게
소리가 나는 자갈길을 깔아주고
군데군데 돌무덤을 예쁘게 쌓겠네.
아침이면 노란 새소리로 풀꽃을 깨우고
낮에는 이깔나무 잎으로 하늘을 경작하다가
천마봉 노을로 저녁밥을 짓겠네.
가을이 되면 나는
삽살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며
쓸쓸한 상상을 나뭇가지에 끝까지 뜨겁게 펼치겠지만
모두 떠나버린 겨울에는 그녀를 더 쓸쓸하게 하겠지?
그러나 난 그녀를 끝까지 지키는 장사송(長沙松)으로 눈을 얹고
진흥굴 앞에서 한겨울을 품위 있게 나겠네.
설혹 그녀에게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위에 저렇게 귀여운 암자를
옥동자처럼 낳고 살 것이네. *
* 김화영시선집[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선운사 가는 길 -시와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