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12월 시 모음

효림♡ 2011. 12. 2. 09:09

* 12월 - 장석주  

해진 뒤 너른 벌판   

하늘엔 기러기 몇 점  

처마 밑

알록달록한 거미에게

먼 지방에 간 사람의 안부를 묻다 *

 

* 12월 - 박재삼  

욕심을 털어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 12월 -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家産)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 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 12월의 숲 - 황지우   

눈 맞는 겨울나무 숲에 가 보았다
더 들어오지 말라는 듯
벗은 몸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 목숨들로 연대(連帶)해 있었다
눈 맞는 겨울나무 숲은
목탄화(木炭畵) 가루 희뿌연 겨울나무 숲은
성자(聖者)의 길을 잠시 보여주며
이 길은 없는 길이라고
사랑은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이라고
다만 서로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듯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 내리고
겨울 나무 숲은 내가 돌아갈 길을
온통 감추어 버리고
인근 산의 적설량(積雪量)을 엿보는 겨울나무 숲
나는 내내,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렸다.

 

* 12월 저녁의 편지 -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 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에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 대궁을 만지자.

 

* 12월 -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 12월의 독백 - 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

 

* 12월의 연가 - 김준태

겨울이 온다 해도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

멀리서 밀려오는 찬바람이

꽃과 나무와 세상의 모오든 향기를 거두어 가도

그대여, 나는 오히려 가슴 뜨거워지리

더 멀리서 불어오는 12월 끝의 바람이

그 무성했던 그림자마저 거두어 가버릴지라도

사랑이여, 나는 끝끝내 가슴 뜨거워 설레이리

저 벌판의 논고랑에 고인 조그마한 물방울 속에서도

때로는 살얼음 밑에서도 숨쉬며 반짝이는 송사리떼들

그 송사리떼들의 반짝임 속이라도 내마음을 부벼 넣으리

어쩌면 상수리 나무 몇 그루처럼 산등성이에 머무는

우리 시대 그대여, 겨울의 그 끝은...

오히려 사랑의 처절한 불꽃으로 타오르리

지금은 두 손뿐인 그대여.

 

* 12월 - 정호승

하모니카를 불며
지하철을 떠돌던 한 시각장애인이
종각역에서 내려
흰색 지팡이를 탁탁 두드리며 길을 걷는다.
조계사 앞길엔 젊은 스님들이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분주히 행인들에게 팥죽을 나누어준다.
교복을 입은 키작은 한 여고생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그냥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의 손을 이끌고
팥죽을 얻어와 건넨다.
나도 그분 곁에 서서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는다.
곧 함박눈이 내릴 것 같다.

* 정호승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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