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사랑 시 모음

효림♡ 2011. 10. 10. 08:38

* 사랑 - 김수영(金洙映)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라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 김수영시선[거대한 뿌리]-민음사

 

* 사랑 - 한용운

봄 물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 말하리

 

* 사랑 - 고은 

사랑이 뭐냐고

문기초등학교 아이가 물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한 나머지

지나가는 새 바라보며 얼버무렸다

네가 커서 할 일이란다

 

돌아서서 후회막급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고

왜 대답하지 못했던가

그 아이의 어른은 내일이 이미 오늘인 것을

왜 몰랐던가

 

저녁 한천가

한 사내의 낚싯줄에 걸려버린

참붕어의 절망이 내 절망인 것을

왜 몰랐던가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 *

* 고은시집[상화시편]-창비

 

* 비의 사랑 - 문정희 

몸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의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을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 . *

* 문정희시집[찔레]-북인

 

*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 이원규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산모퉁이 돌아오는 시골 막버스처럼
오기 전엔 도대체 알 수 없는 전화벨처럼 오는가

마침내 사랑은
청천하늘의 마른번개로 온다
와서 다짜고짜 마음의 방전을 일으킨다

들녘 한복판에
벼락 맞은 채 서 있는 느티나무
시커멓게 팔다리 잘린 수령 오백년의 그는
이제서야 사랑을 아는 것이다

사랑과 혁명 그 모든 것은
비로소 끝장 나면서 온다
제 얼굴마저 스스로 뭉개버릴 때
와서 이제 겨우 시작인 것이다 *

 

* 사랑업 - 도종환

이 세상에는 저만 모르는 채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저만 모르는 채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동안
제가 불을 붙이고
창을 열어 꺼뜨린 촛불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쌓은 선업과 악업이
사랑과 미움으로 자라는 동안
저만 모르는 채 떴다 지는
별 몇 개 있습니다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사랑 - 박영근 
어느 날 너에게도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미친 꽃들처럼
봄을 온통 들어올리는 그 웃음소리처럼//
그리고 너는
자궁에 물이 마르고
고름이 흐를 때까지
오래 여자를 헤매일 것이다//
시궁창에 제 새끼를 버리고 노랫가락을 두드리는
여자의 가랑이에선
또 물이 흐르고//
저기 봐라, 술병 속에서 꽃들이
벌써 벌건 속잎을 벌리고
환하게 젖고 있다 *

* 박영근시집[별자리에 누워 흘러간다]-창비

 

* 사랑한다 -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 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

 

* 사랑의 지옥 -서시 -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

 

* 돌쩌귀 사랑 - 정일근 
울고 불고 치사한 이승의 사랑일랑 그만 끝내자
태어나 우리 한 몸의 돌쩌귀로 환생하자
그대는 문설주의 암짝 되고 나는 문짝의 수짝 되어
그 문 열리고 닫힐 때마다 우리 뜨겁게 쇠살 부비자
어디 쇠가 녹으랴만 그 쇠 다 녹을 때까지
우리 돌쩌귀 같은 사랑 한번 해 보자

 

* 사랑 - 김용택  

네가 보고 싶다

눈이 내린다

네가 보고 싶다

솔잎이 내린다

성긴 눈발 한 송이가 닿아도

떨어지는 솔잎 같은,

그런 것이

사랑이리 *

 

* 사랑 - 박철

나 죽도록

사랑했건만,

죽지 않았네

 

내 사랑 고만큼 모

자랐던 것이다

 

* 사랑 - 안도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이가 눈물 짓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 사랑 - 이정하

마음과 마음 사이에

무지개 하나가 놓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 사랑은 - 채호기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거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 채호기시집[수련]-문지 

 

* 사랑論 - 허형만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때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 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 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 허형만시집[첫차]-황금알

 

* 사랑은 - 유자효

사랑은 언뜻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그 짧은 시간을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은 인생을

냄새나는 인생을

미워하며

눈물 흘리며 미워하며

피 말리듯이

가슴을 졸이는 것

 

* 내 사랑은 - 이향지  

 
내 사랑은 길고 깊은 골절의 와중
뼈 부러진 아내를 위해 우족을 씻고 있는 남자의 물 묻은 손등 위
뼈 부러진 아내를 위해 젖은 홍화씨를 볶고 있는 남자의 구부정한 어깨 위
뜨거운 솥 안에서 하염없이 휘둘리고 있는 나무주걱의 자루 끝 *

 

*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 이기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本家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 사랑노래 - 나기철 
그래,
너 좋을 대로
좋은 사람
잘난 사람
다 만나고
나 같은 놈일랑
한 삼사십 년쯤 후
내가 푹, 쭈그러지면
그때라도
만나주거라 *

 

*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알렉산데르 푸슈킨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랑으로 인해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지는 않겠습니다.  

슬퍼하는 당신의 모습을

절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말없이,

그리고 희망도 없이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때론 두려워서,

때론 질투심에 괴로워하며

오로지 당신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부디 다른 사람도

나처럼 당신을 깊이 사랑하길 기도합니다.

*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 G. 밴더빌트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외로운 여름과

거짓 꽃이 시들고도

기나긴 세월이 흐를 때까지.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얼어붙은 물 속으로 파고드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지긋이 송이송이

내려앉는 눈과도 같이.


조용히 천천히

땅속에 뿌리박은 밀,

사랑은

열정은

더디고 조용한 것,

내려왔다가 치솟는 눈처럼.


사랑은 살며시 뿌리로 스며드는 것.

사랑은 조용히

싹을 틔운다.

달이 차듯 천천히. *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운사 시 모음  (0) 2011.10.22
자작나무 시 모음  (0) 2011.10.14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0) 2011.10.05
10월 시 모음  (0) 2011.09.30
들국화 시 모음  (0) 2011.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