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효림♡ 2011. 10. 5. 08:22

* 저물녘 논두렁 - 정철훈 

하루도 이틀도 심심한 비가 내리네

장성 갈재를 넘어서면

갈맷빛 무등산 아래

고물거리는 사람들

순한 얼굴에 웬 슬픔은 일렁여

지난밤에 모두 안녕하신가

깊은 속내는 가슴에 묻은 채

꽁초를 빨고 소주를 들이켜고

실없이 코를 벌름이는가

오늘 넋두리 같은 가랑비는

울어도 울어도 가난했던 농촌을 적셔

온통 고향 생각뿐

용케 빗줄기 굵구나

저물녘 논두렁을 지나면

무엇이 세상을 견디는지

지금은 돌아간 사람처럼

풀잎 하나에도 머뭇머뭇

하루도 이틀도 심심한 비가 내리네 *

 

* 참 환한 세상 - 이중기

파꽃 한번 오지게 둥둥둥 피어난다

거두절미하고 힘찬 사내의 거시기 같다

 

단돈 만원도 안되는 원수 같은 것들이

탱탱하게 치솟는 풍경을 흘겨보던

등 굽은 늙은이 입술 묘하게 비튼다

빗장거리로 달려들어 북소리 물고

둥둥둥둥, 북소리 물고 달려가는

저, 수여리들의 환호작약에

늙은이는 왈칵, 그리움도 치살려본다

 

내 아직 펼칠 뜻 없는 건 아니리

시간이 마음을 압도하는 벼룻길일지라도

북소리로 팽팽하게 펼쳐 보일 수 있으리

화살되어 궁궁궁궁 달려갈 수 있으리

 

연꽃이 게워내는 법구경보다

참 노골적으로

욕망의 수사를 생략하며

무궁무궁 피어나는 파꽃의 절경에 젖은 늙은이

젖 한통 오지게 빨고 있는 웃는 아이 같은

저 늙은이 파안

저승꽃 만발한 서러운 절창! 

 

세상 참 환하다 *

 

* 차표 한 장 - 강은교

  바람이 그냥 지나가는 오후, 버스를 기다리고 있네, 여자애들 셋이 호호호ㅡ 입을 가리며 웃고 지나가고, 헌 잠바를 입은 늙은 아저씨, 혼잡한 길을 정리하느라, 바삐 왔다갔다하는 오후, 차표 한 장 달랑 들고 서 있는 봄날 오후, 아직 버스는 오지 않네

  아직 기다리는 이도 오지 않고, 양털 구름도 오지 않고, 긴 전율 오지 않고, 긴 눈물 오지 않고, 공기들의 탄식소리만 가득 찬 길 위, 오지 않는 것투성이

  바람이 귀를 닫으며 그냥 지나가는 오후, 일찍 온 눈물 하나만 왔다갔다하는 오후

  존재도 오지 않고, 존재의 추억도 오지 않네

  차표 한 장 들여다보네, 종착역이 진한 글씨로 누워 있는 차표 한 장.

  아, 모든 차표에는 종착역이 누워 있네. *

 

* 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오붓한 산길을 조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숨길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는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내통(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

 

* 비망록 2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 최영숙

누가 남겨놓았을까

정거장 옆 낡은 공중전화에는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 돈

60원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어디로도 반환되지 않을 것이다

이 봄

 

긴 병 끝에 겨울은 가고

들판을 밀고 가는 황사바람을 따라

부음은  왔다 어느 하루

민들레 노란 꽃이

상장(喪章)처럼 피던 날 너는

어지러이 마지막 숨을 돌리고

나는 남아 이렇게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떠도는 홀씨 환한 손바닥으로

받아보려는 것이다

 

저 우연한 단돈 60원이

생의 비밀이라면

이미 써버린 지난 세월 속에서

무엇과 소통하고 무엇이 남아

앞으로 남은 시간을 견디게 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환되지 않는 것조차 남기고 간다는 것을

 

너는 알았을 것이다

나만 몰랐을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두 손처럼

세월이 가고 다시 이 자리에 섰을 때

무엇이 달라져 있을 것인가

나 또한 바람 속에 흩어져 있을 것이고

흩어진 자리에 만들레꽃 한두 송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안녕, 사랑아 *

 

* 나무, 또는 나의 동반자인 - 박경원

내 매양 그대 생각하면

그대는 내 마음의 바람속에

자라고 있는 나무와 같다

이처럼 그대가 그대의 아들에게 하듯이

내 머리 쓰다듬고 잠재우는 그늘 주며

어쩔 바 모르는 젊은 날의 산책길에

나무, 또는 나의 동반자인 그대

괴로움의 뒤엉키고 매듭진 뿌리이며

내 마음속 정겨운 징표로 옹이 지고

평온한  날 물 위 바람으로

깜빡, 오랜 날을 보내온 양 무늬결 지니는

그대, 이 모든 자연스러운 것들의 심성으로

잠들며, 또한 새벽 속에 이슬 뿌리고 기지개 켜는

그대, 품안에 새 기르고

그 새의 노래에 정신 팔려 귀 기울이고

때로 장난처럼  그 새 날려보내기조차 하는

나무, 또는 나의 동반자여

그대 속의 나인 그대 *

 

* 아이러니 - 박영희  

  저리도 많고 많은 노래 중에 왜 하필이면 가련다 떠나련다란 말인가 어쩌자고 아버지는 못살아도 좋고 외로워도 좋단 말인가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하셨다 농사꾼이 농사나 지을 일이지 나락 내는 날 아버지는 떡하니 손잡이 달린 축음기를 사들고 오셨다 동네에서 두 대뿐인 라디오도 이젠 양이 차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덕에 알게 된 코맹맹이 이난영, 가슴 쥐어짜는 나애심, 비에 젖은 고운봉...... 정말이지 아버지는 엉뚱한 양반이었다 라디오도 양에 차지 않아 축음기더니 이번엔 민비가 그립다며 흑백 텔레비였다 농사일에 고단할 텐데도 아버지는 민비에 꽃피는 팔도강산에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까지 보약 챙겨 드시듯 꼭꼭 챙겨 보셨다 입도 맞추고 허리도 껴안고 아이 러브 유도 뱀 허물 벗듯 속삭여대는 낭만적인 그 이국영화를 말이다
  그런 아버지가 어쩌자고 노래의 '노'자도 모르는 어머니를 만났을까 목포의 눈물은 고사하고 텔레비만 켰다 하면 오분 이내에 잠들어버리는 어머니를
  눈물어린 보따리에 젖어든 황혼빛 탓이런가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시선 300 기념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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