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섬진강 시 모음

효림♡ 2012. 1. 6. 15:11

 

* 섬진강에서 - 고은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
내가 부르면 가까운 산들은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에 떠오르지만
또한 저 노고단 마루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흐를 따름이다.
저문 강물을 보라.
나는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과
그보다는 강물이 저 혼자서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한 채를 싣고 흐르는 것을 본다.
저문 강물을 보라.
강물 위에 절을 지어서
그곳에 죽은 것들도 돌아와
함께 저무는 강물을 보라.
강물은 흐르면서 깊어진다.
나는 여기 서서
강물이 산을 버리고
또한 커다란 절을 버리기까지
저문 강물을 쉬지 않고 볼 따름이다.
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아서
강물은 구례 곡성 여자들의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강기슭의 어둠을 깨우거나
제자리로 돌아가서
멀리 있는 노고단 마루도 깨운다.
깨어 있는 것은
이렇게 저무는구나.
보라. 만겁(萬劫) 번뇌 있거든 저문 강물을 보라. *

 

* 형님네 부부의 초상 - 이시영 

고향은 형님의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단단한 어께
이마가 서리처럼 하얀 지리산이 나를 낳았고
허리 푸른 섬진강이 나를 키웠다

낮이면 나를 낳은 왕시루봉 골짜기에 올라 솔나무를 하고
저녁이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먼 곳을 그리워했지

(...)

고향은 형님의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너른 어깨
우리가 떠난 들을 그들이 일구고
모두가 떠난 땅에서 그들은 시작한다
아침노을의 이마에서 빛나던 지리산이
저녁 섬진강의 보랏빛 물결에
잠시 그 고단한 허리를 담글 때까지 *

 

* 섬진강에서 - 함동선

둥둥둥 북소리에 끌려왔더니
섬진강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로
종이처럼 얇고 깨끗하다
짐을 부리기 전인데
나는 이미 강이 됐는가 했더니
너는 물이 되어 흐른다
여기저기서
길이 한 자 두 치 둘레 여덟 치의 소리 북에
평생을 갇혀 산 김명환*의 북소리가
가슴을 두드리다가
나중엔 핏속으로 흘러들어 온몸을 죄기 시작한다
작설차에 젖은 오후
역마**의 슬픈 사랑을 기억하는
매화가 피기 시작한다
굽이굽이 주막이 있고 색시가 있고
은어회 맛내는 육자배기 가락이 있어
산수유꽃도 개나리꽃도 가만있질 않는다
지나간 시간들이 밀려가고 있는 이 곳
내가 너를 기다리는 오래 전부터
네가 기다린 곳은 이런 데가 아니었는가
비어 있으면 채우기가 쉬운 법인데
너에게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하동 화개 쌍계사 구례 곡성 남원
그리고 지리산이
목판화 되어 둥둥 떠간다 *
*김명환(1913-1989)-
송만갑 임방울 박녹주 등의 명창이 함께 무대 서기를 바랬던 최고의 고수(鼓手)-북쟁이
**역마(驛馬)_김동리(1913-1995)의 소설

* 섬진강에 부는 바람 - 김용택

이 산 저 산 넘어서/ 섬진강에 부는 봄바람은/ 강물을 찰랑 놀리는데/ 이내 마음에 부는 봄바람

흔들려야 물 오르는/ 버들 실가지 하나 못 흔드네/ 어쩔거나 어쩔거나/ 섬진강에 오는 요 봄

올똥말똥 저기 저 봄/ 바람만 살랑 산 넘어오네./ 이 산 저 산 넘어간 내 님/ 이 산 저 산 못 넘어오고

소쩍새 소리만 넘어오며/ 이 골짝 저 골짝 소쩍거려/ 꽃 흔들어 산 밝혀놓고/ 꽃구경 오라 날 부르네.

어서 오소 어서 오소/ 나는 못 가겠네 어서 오소/ 보리밭 매다가 못 가겠네/ 앞산 뒷산에 부는 바람아

보릿잎 살짝 눕히는 것같이/ 이 몸 눕히며 어서 오소/ 태산같이 넘어져 오/소 이 몸 위로 넘어져 오소. *

* 김용택시집[참 좋은 당신]-시와시학사

 

*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 김용택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

 

* 섬진강변에서 - 천금순 
비로소 강물은
지리산 고원분지 운봉 땅에 고리를 박고
줄을 매달아 동편제 판소리 한가락으로 흐른다
내가 발자국으로 걸어온 몇 백리 길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며 흐르고 흐른다
산내, 운봉, 주천, 구례, 하동으로
싸리꽃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산속
막걸리주막의 외롭기만 하다는
할머니의 긴 넋두리도 흐른다
쌍계사 화개장터를 내려와
막차표를 끊어놓고 잠시 남도대교 아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피라미떼를 본다
강 건너 초록의 대숲 시퍼런 낫으로 산죽을 치는
소리 휘어 활시위소리 내며 흐른다
강물에 뜬 둥근 낮달에 늙은 내 얼굴을 비추어본다
멀리 있는 그대에게 흐르는 물로 초록의 편지를 쓴다

* 섬진강의 추억 - 황동규

동백 피고 지는 화개(花開) 물가에서

그대 얼굴 비추고 흐른 물이

검은 머리에 환한 이마를 비추고 내려온 물이

산과 산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 하동 포구 가까이 흘러와

문득 정신 차리고 그대 모습 기억할까?

검은 머리와 명도(明度) 높았던 이마를?

그대로가 아니라면

옛 필름의 네거티브

검은 머리가 백발로 떠지는 얼굴이라도.

추억도 시간 속에 불을 켰다가 끈다.

눈을 보호하려고 만들어진 눈물이 그만 눈을 달구어

불 켠 동백들을 흐릿하게 번진 등불로 만든들!

억도 시간 속에 불을 켰다가 끈다.

 

허나 이 환한 봄 저녁, 동백 아닌 것들도

어쩌다 만나는 농수로(農水路)의 사타구니와

서툴게 핀 들꽃들도

자신의 가장 요긴한 소리들을 내고 있다.

가만히 눈 식히고 들여다보니

그대 것이었던 싱싱한 얼굴 하나

봄불에 녹고 있다. *

* 황동규시집[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

 

 

* 섬진강에 지다 - 강연호 

가을 섬진강을 따라가려면
잠깐의 풋잠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구례에서 하동쯤 지날 때
섬진강은 해가 지는 속도로 흘러간다
어쩌면 지는 해를 앞세우기 위해
강은 제 몸의 만곡을 더욱 휘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는 길도 섬진강을 따라가므로
갈 길 바쁜 사람도 홀연 마음 은근해진다
나고 죽는 일이 괴롭다면 내처 잠들어
남해 금산 바닷물에 처박힐지 모른다
문득 깨어나 모골이 송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헛것이 이끌었다고 말하지는 말자
다 섬진강을 따라나선 죄일 뿐
정신 차리고 싶다면 쌍계사 절간 밑에서
은어회라도 바득바득 씹어보자
너도 먼 길을 취해 여기까지 왔구나
날것의 몸보시를 받다 보면
출가와 환속은 한통속처럼 저물 것이므로
그러면 또 삶이란 죽음이란
녹슨 단풍잎같이 애면글면 글썽거릴 것이다
그렇다고 그 까닭 모를 서러움을
섬진강 물결이나 가을볕에 빗대지는 말자 * 
* 강연호시집[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 평사리행(平沙里行) - 송수권

평사리의 섣달 어두운 하늘에 떠서
갈갈 울고 오는 기러기떼
쓸쓸한 바람 따라 이 들녘 끝
일렬횡대로 내리는 것 보니
그날, 봉준의 書床臺 위에 떨어진
육효점괘 한번 보는 듯하군

진 날 갠 날 마른 땅을 골라
언제고 태평한 세월 平沙落雁이야
따로 있었을까마는
이곳 村老들의 말에 따르면
육효점괘 하나는 늘 입성이 나
경천, 경천을 조심하라고
그래서 봉준은 공주성을 칠 때도
노상 비실거리며 敬天店을 겉돌기만 했던가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십이월 막소금 같은 눈발에 쫓기어오다
避老里의 한 주막집에 들러
그 敬天에게 참말 목을 졸릴 줄이야
避老里 또한 피로하게 작부나 얻어 끼고
한세상 목마른 술이나 얻어 마실 땅인 것을

오늘 평사리 이 넉넉한 들을 빠져나오며
역사는 이긴 자의 힘이고
패배자의 군소리라는 것을
저 들녘 끝 떠도는 쓸쓸한 바람이 일러주었네.

 

* 하동시편 - 정희성 

봄이 뭍으로 와서 맨 처음 발 디딘 곳이

섬진강 하동포구 어디쯤일까

섬진강 하동포구 팔십리 길을

하루는 말고 한 닷새쯤 걸어봤으며

꿈길 같은 그 길로 바람이 불어

벚꽃이 수천수만 소쿠리 지고 나면

배꽃이 또 수천수만 소쿠리 피어나던 것을

최참판댁 뜨락에 수북이 부려놓고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퍼가라고 눈짓하듯이

그 녘 인심이 그렇게 넉넉한 건지도 몰라

언젠가 진주에서 술대접 좋이 받고

거나하게 취하여 이 길을 지나더니

다주불이(茶酒不二)라고 술 대신 내어놓은

야생차 그 맑은 향기에 정신이 들던 것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러들여

햇봄 묵은 정 다 퍼주고서는

그만 혼자 쓸쓸해지는 평사리 봄밤 같은

벗이여 우리네 삶이 녹차 향만 하던가

벗이여 우리네 삶이 녹향 향만 하던가 *

 

* 하동포구 - 문병란  

流行歌 가락 따라

나도 모르게 왔네

빈 호주머니 노자도 없이

엿판도 못 짊어진 전라도 사나이

三鶴소주 한 잔에 취해서 왔네

하동포구 80리에 빈 모래사장만 눈부시고

발자국도 없이 쫓겨 온 사나이

눈부신 햇살에 갇혀 길을 잃었네

무슨 알뜰한 옛사랑의 명세도 없이

三千浦 아가씨 설운 눈물도 없이

덧없이 부서진 마음 모래알로 빛나는데

어디서 누가 花無十日紅의 옷소매 잡는가

눈부신 한낮이 길게 누워 있는 나루터

主人 잃은 빈 배만 흔들리는데

눈물을 씹어 봐도 한숨을 씹어 봐도

쓴 맛 단 맛 알 수 없는 설운 내 팔자

하동포구는 아직도 울고 싶은 곳이더라

하동포구는 아직도 사나이 옛정이 목메는 곳이더라

돈 타령 팔자 타령 사랑 타령

한 잔의 막걸리만 남은 땅에서

어느 문둥이가 손톱을 뭉게다 간 모래밭에서

알알이 빛나는 모래알을 적실

무슨 짭짤한 눈이나 남았던가

모래밭 속에 몹쓸 이름 깊이 묻으면

추억은 소주처럼 저려오는 눈

두 주먹 불끈 쥐고 땅을 쳐 봐도

뻘밭에 오줌을 철철 갈겨 봐도

무심한 햇살만 남아 있더라

빈 소줏병만 남아 있더라

환장하게 환장하게

눈부신 모랫벌만 지글지글 타더라 

 

* 강 끝의 노래 - 김용택                            

섬진강의 끝

하동에 가 보라

돌맹이들이 얼마나 많이 굴러야

저렇게 작은 모래알들처럼

끝끝내 꺼지지 않고

빛나는 작은 몸들을 갖게 되는지

겨울 하동에 가 보라

물은 또 얼마나 흐르고 모여야

저렇게 말 없는 물이 되어

마침내 제 몸 안에 지울 수 없는

청청한 산 그림자를 그려 내는지

강 끝

하동에 가서

모래 위를 흐르는 물가에 홀로 앉아

그대 발밑에서 허물어지는 모래를 보라

바람에 나부끼는 강 건너 갈대들이

왜 드디어 그대를 부르는

눈부신 손짓이 되어

그대를 일으켜 세우는지

왜 사랑은 부르지 않고 내가 가야 하는지

섬진강 끝 하동

무너지는 모래밭에 서서

겨울 하동을 보라 *

 

* 낙화 - 정호승

섬진강에 꽃 떨어진다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결코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꽃 떨어진다

 

지리산

어느 절에 계신 큰스님을 다비하는

불꽃인가

불꽃의 맑은 아름다움인가

 

섬진강에 가서

지는 매화꽃을 보지 않고

섣불리

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섬진강길 - 복효근

어머니가 빚어 띄운 메주짝

잘 마른 고추 부대 싣고

가난한 큰누나

찾아가는 섬진강길

양지바른 모랫벌에

해묵은 가난 이야기랑 서러운

누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한 짐씩 풀어놓고 가다보면

강물도 목이 메는지저기 저 압록이나 구례구

쉬었다가 흐르는 강물에선

메주 뜨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슬픔인 듯 설움인 듯

가슴엣 것들이 썩고 또 삭아서

가난해서 죄없던 시절은

드맑은 눈물로 괴는가

도른도른 강물은

어머니 띄운 장 빛깔로

굽이굽이 또

천리를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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