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시인의 오지 기행 -고요로 들다

효림♡ 2012. 9. 19. 08:49

* 시냇물 - 이윤학 

물 속의 작은 조약돌들

물의 살을 찢고 가른다

물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마음 속에 박힌 응어리들

숨은 악기들 *

 

* 들길 - 이윤학

들깻잎에 벌레가

일회용 우물을 파놓았다.

 

그 우물 점점 깊어졌다.

그 우물 점점 넓어졌다.

 

언젠가,

누군가의 여린 가슴에

저런 우물을 팠었다.

 

그 사람 얼굴을 잊었다.

누렇게 쇤 들깻대

지독한 냄새 진동한다. *

 

* 금대계곡 - 정용주 

얼음 속 뿌리 둔 생강나무

손톱으로 벗기면

연둣빛 물 들었다

 

바위 계곡 얼음장

송사리 떼 아가리

숨구멍을 만들었다

 

바람이 녹이는 얼음은 바람이 된다

물이 녹이는 얼음은 물이 된다

 

물소리만 바위 계곡에 남는다 *

 

* 월광욕 - 이문재

달빛에 마음을 내다 널고

쪼그려 앉아

마음에다 하나씩

이름을 짓는다

 

도둑이야! 낯선 제 이름 들은 그놈들

서로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마음 달아난 몸

환한 달빛에 씻는다

이제 가난하게 살 수 있겠다 *

 

* 병 - 기형도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짤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 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 사랑을 잃은 후 - 전윤호

도원읍에 돌아가 봄 강변에 앉고 싶어

등짝을 후려치는 바람이 불고

얼어죽은 겨울이 부서져 떠내려갈 때

검은 벼랑 마주보고

청삽사리처럼 짖고 싶어

서운산에 구름이 걸려

선혈이 낭자한 저녁

얼굴을 가린 슬픔이 깃발을 들고 달려오면

소주를 병째 마시고

아라리 한 곡조 띄우고 싶어

그대 떠난 자리가 아무리 깊어도

바닥까지 환희 들여다보이는

도원읍에 돌아가 봄 강변에 앉고 싶어 *

 

* 수평선 - 손택수

배가 해를 안고 바다를 다린다

꾸욱꾸욱 주름을 펴며 수평선을 건너간다

복화술사처럼 한 일자로 입을 다문 수평선

저 과묵 속엔 얼마나 많은 파란만장이

물결치고 있다는 말인가

 

이 생에 수평선처럼 쫙 펴지긴 글러먹은 마음이여

달아오른 갑판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스팀 물보라를 보라

 

날이 선 일등 항해사

제복을 꿈꾸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 

 

* 오징어 먹물에 붓을 찍다 - 손택수 

오징어는 바다를 갈아 먹물주머니를 채운다. 바다 속에서 나온 책 <자산어보>, 바다를 벼루 삼아 먹을 갈며 캄캄한 유배를 살던 사람의 이야기. 오징어 먹물로 쓴 글은 유난히 반지르르 윤기가 돌았다고 한다. 그 글씨들 오래되면 희미하게 지워져서 마침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는데, 바닷물에 담그면 먹빛이 그대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지상에서 잠시 반짝이다 져버릴 운명을 위해 바다에 뛰어든 적이 있는가, 바다 속에 수장된 뒤 부활하는 말들을 꿈꾼 적이 있는가. 여기는 잠시도 망각을 견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땅. 그러나 먹물이 들려면 오징어 먹물쯤은 되어야 한다. 막막하게 뻗어간 수평선 위로 번지는 먹물을 뒤집어쓸 줄 알아야 한다. *

 

* 사람이 사는 길 밑에 - 박재삼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ㅡ다 그런 일이라! *

 

* 오지 - 고영민  

하루 한 번 가는 버스를 탔다

산언덕을 넘자 거짓말처럼 마을이 있었다

굴피나무집 부엌엔

송아지가 살고

장정들은 소 대신 쟁기를 끌며

산비탈 약초밭을 일구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중얼거렸다

골풀이 수북한 경사지 아래

흑염소 울음소리가

검었다

밤이 되자 산 하나가 죽고

굴피나무집에

등잔이 켜졌다 *

 

* 고목에게 당하다 - 김규성

   애당초 산에 대해 시 나부랭이로 아첨 몇 번 했다고 산이 덥석 열외로 쳐주리라 생각한 게 실수였다 허락도 없이 무단 점거한 산길 알아서 가만가만 그리로만 다닐 일이지 태초의 직유만으로 저희끼리 잘 사는 숲에 벌써 특권이라도 주어진 양 겹겹 오염된 은유와 상징 몇 외워 함부로 끼어들었으니 그럴밖에 가시넝쿨 헤치다가 무심결에 잠복한 나무와 정면충돌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예 풀죽은 고목 가지에게 된통 일격을 당했다 눈두덩이 부어오르고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상처는 정확히 눈과 두덩의 경계에 딱 그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눈두덩이 저를 바쳐 눈알을 오구감탕 감싼 것이다 어미가 새끼를 품듯 껍질이 알을 꼭 껴안은 것이다 참으로 잽싸고 갸륵한 충정이다 얼마나 놀라운 경비태세냐 좋다 오늘은 비록 낯가림 심한 산에게 징벌의 낯붉힘을 당한 터지만 그래도 내겐 혼신을 다해 제 몸을 감싸는 초병이 있다 그것을 확인했다 든든한 백이다 이제 산도 알 것이다 *

 

* 수몰 지구 - 길상호  

   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을, 나는 그 마을 이름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물에 갇혀 있는 동안 모든 것이 허물어졌으므로 별다른 이름이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유물처럼 남은 돌담들, 한때 가족의 삶을 지키던 성벽은 시퍼런 수압에 함락되고 장독의 파편이며, 여물통, 절구통, 저마다 훔푹 패인 가슴에 눈물을 담아 차마 울음은 삼키고 있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눕히던 구들장 아직도 반듯하게 햇살로 달구어져 따뜻한 꿈을 꾸는 모양인데 떠나간 사람들 모두 어디에서 행복할까요 세월이 물때처럼 층층이 쌓이면 사람도 하나씩 허물어지고 그들 또한 세월로 스미겠지요 여름이면 집집이 그늘로 덮어 주던 나무들 이제 뿌리도 썩고 애써 기억을 한 잎씩 붙여 놓아도 피어나지 못한다는 것 알았습니다.

   장마가 지고 또다시 물 속에 갇히게 될 마을, 그래도 아픈 상처마다 메꽃 줄기가 덮여 있었습니다. 그 조그만 잎사귀들이 상처난 자리 손을 뻗어 어루만지며 가끔 꽃망울로 울음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

 

* 저구마을 - 이진우
거제도 굽은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보면
세상을 잊고 달리다 보면
긴 뱀이 섬으로 누워 있는 바다가 있다

주머니가 늘 비어 두 손을 내놓고 다니는 사람들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다투어 안부를 묻는 버스 정거장에서
바다가 가끔 펄떡인다

저구에 닿으면
바다가 먼저 안부를 묻는다
버려진 집들이 아는 체를 하고
아이들이 뒤를 쫓아 다닌다

바다를 목에 두르고
자갈로 머리를 장식한 해변에
세상의 모든 것이 쓸려와 마을을 이룬 해변에는
생각이 많은 바람과
쉬지 않고 물질하는 파도가 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면
바다에서 쏟아진 별이 하늘을 채운다
별을 보고 짖던 개가 제풀에 지치면
파도는 한껏 졸고
막걸리 양조장이 문을 닫으면
바람은 대숲에서 잠을 청한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꿈 몇이
바다에 일렁이는 달빛으로 배를 불리는 밤


저구의 밤은 깊다 *

 

* 어느 해 봄날의 편지 - 허균

   봄기약 이미 어그러지고, 산꽃들 그대 위해 모두 날립니다. 녹음 이토록 무성해지고 꾀꼬리 정히 교태로우니, 사람 움직이는 봄빛이 어찌 꼭 계곡 가득한 복사꽃이라야만 하겠습니까. 섬돌 계단을 덮은 붉은 작약 또한 나름대로 볼 만합니다. 보잘것없는 수레 보내드리니 채찍을 재촉하여 오시기를 바랍니다. 한창 익은 차좁쌀로 빚은 술 걸러놓고 그물 엮어 시내에 쳐놓았으니, 그대를 기다려 잉어 회를 칠 생각입니다. 석순과 자라도 안주거리로 장만해야겠지요. 저야 평생토록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린 탓에 술과 음식으로 청하는 것이니, 먹는 것만 탐한다고 비웃지 마소서. 간절히바라옵니다. -김풍기 역

 

* 방화(訪花) - 정약용

折取百花看 - 이 꽃 더 꽃 다 꺾어 들여다봤자

不如吾家花 - 우리 집 꽃만 못하다네

也非花品別 - 그건 말일세, 꽃이 달라서가 아니라

秪是在吾家 - 다만 우리 집에 있기 때문이라네 *

 

* 욕천(浴川) - 남명 조식(曺植)

全身四十年前累 - 전신사십년전루 - 온몸에 쌓인 사십년간의 허물을

千斛淸淵洗盡休 - 천곡청연세진휴 - 천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 - 진토당능생오내 -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 - 직금고복부귀류 -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

 

* [시인의 오지 기행 -고요로 들다]- 박후기, 이윤학 , 이문재외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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