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짧은 시 모음 4

효림♡ 2012. 9. 26. 09:14

* 숲향기 - 김영랑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

 

* 낙엽 - 유치환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

 

* 산보길 - 김춘수

어떤 늙은이가 내 뒤를 바짝 달라붙는다. 돌아보니 조막만한 다 으그러진 내 그림자다.

늦여름 지는 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 *

 

* 인생 - 이은상

차창(車窓)을 내다볼 제 산도 나도 다 가더니

내려서 둘러보니 산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가나니 인생인가 하노라

 

* 그대, 거침 없는 사랑 - 김용택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 못하는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다 *

 

* 무늬 - 이시영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

저 잎새 그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 *

 

* 은행나무 아래서 - 이시영 
낙엽 저 순명을 다한 것들의 사뿐한 낙하!
나는 지구의 중심을 새로이 걷는다 

 

* 안개가 짙은들 - 나태주

안개가 짙은들 산까지 지울 수야

어둠이 깊은들 오는 아침까지 막을 수야

안개와 어둠 속을 꿰뚫는 물소리, 새소리,

비바람 설친들 피는 꽃까지 막을 수야. *


* 처음 - 곽재구

두마리 반딧불이 나란히 날아간다

둘의 사이가 좁혀지지도 않고

말소리도 들리지도 않고

궁둥이에 붙은 초록색과 잇꽃색의 불만 계속 깜박인다

꽃 핀 떨기나무 숲을 지나 호숫가 마을에 이른 뒤에야

알았다

아, 처음 만났구나 *

* 곽재구시집[와온 바다]-창비

 

* 옥수수 - 곽재구

구워도 먹고

삶아도 먹는다

삶기 전에

소가 오면

얼른 소에게 준다

늙은 소가 웃는다 *

* 곽재구시집[와온 바다]-창비

 

* 밤길 - 곽재구

반딧불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리꽃* 피었다

종리꽃이 피었다

처음 본 꽃의 이름 때문에

잠들지 못한 밤들이 당신에게 있었을 것이다

하양과 보라색 꽃들이

빚은 은하수

눈물로 세수를 하고 싶은 밤이

당신에게 있었을 것이다 *

* 목백일홍의 뱅골어

* 곽재구시집[와온 바다]-창비

 

* 그리운 이에게 - 나해철  

사랑한다고 말할 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박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 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세상의 덤불가시에 살갗을 찔리면서도

내 잊지 못한다는 한 마디 들려줄 걸

혹여 되돌아오는 등 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고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 걸

그리운 사람에게..... *

 

* 새벽부터 내리는 비 - 김승강 
   비야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누이의 발길을 돌려놓아라 새벽에 꿈결에 깨어 어 비가 오네 하고 미소 지으며 달콤한 잠 속에 빠지게 해라 비야 노동판을 전전하는 김 씨를 공치게 해라 무더운 여름 맨몸으로 햇빛과 맞서는 김 씨를 그 핑계로 하루 쉬게 해라 비야 내 단골집 철자의 가슴속에서도 내려라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에 꽁꽁 감추어둔 철자의 첫사랑을 데려다 주어라 비야 내려라 내려도 온종일 내려 세상 모든 애인들이 집에서 감자를 삶아 먹게 해라 비야 기왕에 왔으니 한 사흘은 가지 마라 그동안 세상 모든 짐은 달팽이가 져도 충분하게 해라. *

 

* 빈 들판 - 이제하

빈 들판으로 바람이 가네 아아 

빈 하늘로 별이 지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없이 나를 부르네

 

어쩌나 어쩌나 귀를 기울여도

마음 속의 님 떠날 줄 모르네

 

빈 바다로 달이 뜨네 아아 

빈 산 위로 밤이 내리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없이 나를 반기네

 

* 호구(糊口) - 권혁웅 
조바심에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

 

* 섬 - 함민복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

 

* 무지개 - 김영무

이 땅에 시인 하나 풀꽃으로 피어나

바람결에 놀다 갔다

풀무치 새울음소리 좋아하고

이웃 피붙이 같은 버들치

힘찬 지느러미짓 더욱 좋아했다

찬 이슬 색동 보석 맺히는

풀섶 세상

― 참 다정도 하다 *

 

* 소백산에서 - 고은

칼바람 친다

아직 죽을 수 없다

 

내려가자

내려가

술잔에 메아리쳐 술을 붓자 *

 

* 메밀꽃밭 - 송수권

내 마음 지쳐 시들 때

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

슴슴한 눈물도 씻어 내리고

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운 피의 심장도

말갛게 심어준다.

 

그냥 형체도 모양도 없이

산비탈에 엎질러져서

둥둥 떠내려 오는 소금밭

 

아리도록 저린 향내

먼산 처마끝 등불도 쇠소리를 내며

흐르는 소리 *

 

* 당신에게 말 걸기 - 나호열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

 

* 화살나무 - 박남준 
그리움이란 저렇게 제 몸의 살을 낱낱이 찢어
갈기 세운 채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대의 품 안 붉은 과녁을 향해 꽂혀 들고 싶은 것이다
화살나무,
온몸이 화살이 되었으나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있다 *

 

* 망인(亡人) - 문태준 

관을 들어 그를 산속으로 옮긴 후 돌아와 집에 가만히 있었다

 

또 하나의 객지(客地)가 저문다

 

흰 종이에 떨구고 간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이 사그라진다 *

* 문태준시집[먼 곳]-창비  

 

* 화엄, 두엄 - 반칠환 

모든 꽃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핀다

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절벽이다

 

온 산에 참꽃 핀다

여리디여린 두엄 잎이 참 달다

 

출렁, 저 황홀한 꽃 쿠린내

 

모든 존재가 아름다운 건

꽃잎의 날보다 두엄의 날들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 반칠환시집[웃음의 힘]-시와시학사


* 그늘 농업 - 장석남

양평 골짜기 소나무 바위 밭에 이끼 농사를 지으시는 분
쓰고 남은 상품(上品) 그늘들 묵히기 너무나 아까워 매매하시길
내가 아는 한 여자의 팔월 도라지꽃을 적당히 앉혀서 내놓으시면
오명 가명 처음 보는 상품(商品)에 모두들 궁리가 깊어질 거야
녹음과 보라에 궁리를 더해가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여들 거야
뭣에 쓰는 물건인지 궁금할 거야
눈웃음들 웃으며 궁리할 거야
아무도 사가는 이 없을 테지만 *

* 장석남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 고백 - 이해인

꿈에는

당신을 잊고 싶은데

자꾸만 더 생각나서

행복합니다

 

생시에는 더 많이

당신을 기억하고 싶은데

자꾸만 잊혀져서

걱정입니다

 

이래도 될까요? *

* 이해인시집[작은 기도]-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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