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겨울 시 모음 2

효림♡ 2012. 12. 18. 08:17

* 겨울, 선운사 - 이재무
잿빛 스산한 오후에 당도하였다
허공으로 울컥, 설움 토하는
흰 눈꽃 송이
살(肉) 지워진 자리마다 눈물 흥건하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인을 울리던
막걸리집 잔술 팔며 부르던 작부의
육자배기 설운 가락,
입춘 지났으나 때 일러 동백 피지 않았다
초경 맞은 소녀 젖가슴인 냥
가지마다 아프게 봉오리만 돋아 있었다
한눈 팔다가
이곳에 오는데 47년이 걸렸다
절정의 동백 눈으로 밟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선, 운, 사 하고
절 이름 입 속으로 가만히 떠올리면
소주 먹은 듯 소주 먹은 듯
온몸 상기도 달아올랐다
그러나 처자식을 부양하여야 하는, 나는
가난한 가장
빠르게 등 덮어오는 산 그림자 두려워
절간에 담군 생을 빼내어
되돌아 빠르게 발을 놀렸다 
 

* 이재무시집[푸른 고집]-천년의시작

 

* 겨울 초대장 - 신달자

당신을 초대한다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망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고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安樂)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이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 같은 이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잎처럼
춤추며 내린다 내뜰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온 누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위에

뜨거운 차를 분배하고
당신이 누른 초인종 소리에
나는 답한다

어서 오세요
이 겨울의 잔치상에.
 

 

* 겨울 아침 - 나희덕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눈 부비며 쌀을 씻는 동안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
어미새가 소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내려앉자
허공 속의 길을 따라
여남은 새끼들이 푸르르 단풍나무로 내려온다
어미새가 다시 소나무로 날아오르자
새끼들이 푸르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가 꽉 찬다
큰 날개가 한 획 그으면
모화(模畵)하듯 날아오르는 작은 날개들,
그러나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곧 오리라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
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
쌀 씻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창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한 생애가 가리라

 

* 겨울비 - 황동규 
두 번째 닭이 운다.
예수도 불타도 아르튀르 랭보도
사람들이 그냥 세상 사람처럼 사는 걸 못 참아 했는데
닭이 그냥 동네 닭처럼 우는 걸
바퀴벌레들이 바퀴벌레처럼 숨는 걸
사람들이 눈꺼풀 벗기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건강식 한 공기 삼키거나
빵 한 조각에 인스턴트커피 마시고 집을 나서는 걸
못 참아 했는데.
아파트 밖 겨울 초등학교 짐승 우리에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어눌한 어조로 닭이 세 번째 운다.
조금 후엔 사람들이 하나같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한번 넣었다가 끄집어내어
말없이 건물을 빠져나가리라.
아파트 불빛에 잡히지 않는 겨울비가
나오는 사람마다 이건 누구지? 하나씩 냄새를 맡고 있다.

 

* 누이여 12월이 저문다 - 박정만  

누이여, 벌판에서는 새소리 들리고
수수밭머리에서는
아직도 바람소리 끝나지 않았다
바람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너는 너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철새마저 다 떠나가고 말면
세상에는 무엇이 남아 벌판을 흔드랴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버린 대로 자라나서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비추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12월의 저녁달  
자지러진 꿈,

꿈 밖의 누이여 

 

* 겨울산 - 김수열  
겨울산을 오른다는 건 나무가 되는 것
모든 겉치레를 벗어버린 나무가
그런 나무와 마주 서 있는 동안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나무가 되는 것
나무가 되어 나무의 마음을 엿듣는 것
가문 물소리에 대해
돌아오지 않는 새소리에 대해
임자 없는 무덤의 쓸쓸함에 대해
 
겨울산을 내린다는 건 바람이 되는 것
정처 없이 하늘을 떠돌던 바람이
곤한 몸을 지상에 내려놓는 동안
바람과 바람 사이에서 바람이 되는 것
바람이 되어 바람의 마음을 품는 것
서걱서걱 조릿대에 대해
풍화된 노루의 뼈에 대해
눈발을 숨긴 키 작은 구름에 대해
 
겨울산이 된다는 건
늙은 코끼리의 굽은 등이 되는 것
 

* 김수열시집[생각을 훔치다]-삶창

 

* 눈 내리는 밤 - 강소천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

 

* 겨울이 오면 - 김갑수

겨울이 오면 맑은 얼음장 지쳐가는
낮은 햇살, 겨울이 오면 배달해주게
지난여름에 다 못 쓴 편지, 우연한 사건들과
몇몇의 사람, 오 겨울이 오면

내게 말해주게 사람과 사람이
어긋난 흔적, 몸부림 따위들, 오래
예정된 결말의 느릿느릿한 진행에
끝끝내 겨울이 오면 그 황황한 뒷모습
서둘러 부려놓는 필연의 짐짝에

겨울이 오면 지친 나뭇가지의 손짓으로
헐겁게 흔들리는 약속들과 다만 몇몇의 사람
어떤 일도 체념하기 위하여 겨울이 오면
맑은 얼음장 지쳐가는 운명의 낮은 햇살. * 

 

* 겨울 연못 - 장석남

얼어붙은 연못을 걷는다
이쯤엔 수련이 있었다
이 아래는 메기가 숨던 까막돌이 있었다
어떤 데는 쩍쩍 짜개지는 소리
사랑이 깊어가듯

창포가 허리를 다 꺾었다
여름내 이 돌에 앉아 비춰보던 내
어깨 무릎 팔, 모두 창포와 같이 얼었다
그도 이 앞에서 뭔가를 비춰보던데 흔적 없다
열나흘 달이 다니러 와도 냉랭히
모두 말이 없다

연못에 꿍꿍 발 굴러가며
어찌하면 나에게도 이렇게
누군가 들어와 서성이려나
"이쯤은 내가 있던 자리"
"이쯤은 그 별이 오던 자리"
하며 *

* 장석남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 설후(雪後) - 柳方善

臘雪孤村積未消 - 납설고촌적미소
柴門誰肯爲相敲 - 시문수긍위상고
夜來忽有淸香動 - 야래홀유청향동
知放寒梅第幾梢 - 지방한매제기초

-눈 내린 후에 

외딴 마을 섣달 눈이 쌓인 채 안녹으니,
그 누가 사립문을 즐거이 두드리랴.
밤이 되어 홀연히 맑은 향이 전해 오니,
매화꽃이 가지 끝에 피었음을 알겠노라. 
 

 

* 산중설야(山中雪夜) - 이제현(李齊賢) 

紙被生寒佛燈暗 - 지피생한불등암

沙彌一夜不鳴鐘 - 사미일야불명종

應嗔宿客開門早 - 응진숙객개문조

要看庵前雪壓松 - 요간암전설압송

- 산중의 눈 내린 밤  

얇은 이불에 한기 일고 등잔불 어둑한데

사미승은 밤새도록 종을 울리지 않네

나그네가 일찍 문 연다고 성내겠지만

암자 앞 눈에 눌린 소나무 보고 싶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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