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폭설 시 모음

효림♡ 2012. 12. 29. 15:03

* 폭설 - 도종환
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 폭설 - 나태주  
무슨 할 말이 저리도 많았던 겔까?
무슨 슬픔이 그리도 쌓였던 겔까?
누군가 돌아앉아 퍽퍽 울음 쏟고 있는 사람,
비어가는 가슴이여 휘어지는 나뭇가지여.

 

* 폭설 - 노향림 

누가 활시위를 놓아버린 것일까
고압선에 닿듯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내리는 눈들
어느덧 두루마리로 펼쳐지며 길을 만든다
두루마리 위로 가장 눈부신 순금의 언어를
깔기 위해 눈은 그치지 않고 내린다 *

 

* 폭설 - 석여공  

가끔씩은 저렇게

성난 눈발이었으면 좋겠다

미친 듯이 울다가도

잠깐 햇빛에 흰 이빨처럼

차갑게 반짝이며 웃어 봤으면

좋겠다 가끔씩은 저렇게

겨울 풀꽃이며 사람들의 집

어둔 곳의 캄캄함

우리들의 등 시린 사랑까지도

아주 덮어버렸으면 좋겠다

잠에서 풀린 산기슭 짐승처럼

톡톡 얼음장 깨며

겨울 가뭄 속의

저 지독한 보리 싹처럼 씩씩하게

살아날 것만 살아나고

돋아날 것만 돋아나는

그런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

* 석여공시집[잘 되었다]-문학의전당


*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ㅡ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렀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ㅡ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ㅡ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겄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 폭설 - 윤석산(尹錫山)  

먼 산 가까운 산 한데 엉기어

눈 속에 몸을 숨긴다. 눈 속에 몸을 숨긴다. 우리의 둔감해진 원근법. 포개진 앵글을 조정하며, 우리의 전신, 아 셧더를 누른다

그러나 언제나 꿈은 인화지 밖으로 달아난다 *

 

* 폭설 -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 폭설 -8도 사투리 詩 5 - 서정주
야! 눈이 오네! 눈이 오네!
마구잡이로 눈이 오네!
경상도 안동 말로
희한하겐 눈이 오네!
전라도 광주 말로
아이 잡껏 지랄하네!
함경도 함경도 말로
야! 이! 새쓰개야!
*새쓰개-[미친 사람]이라는 함경도 말.

 

* 폭설 - 김명인 
눈 몇 낱이 금세 폭설을 데리고 온다
저녁이 저무는 일을 잠시 멈추고
얼른 그 눈을 받아 지붕이며 길바닥에 펼쳐놓는다
지금은 한 해 천년이 후딱 지나가는
겨울 저녁 이른 한때,
천년만큼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워진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 얹혔다가
골목 끝으로 내려서 바삐 사라진다
나는 무연히 서서 한 염소가 삼키는 종이쪽인 듯
금세 흐려지는 저들 눈 발짝들 눈으로 주워 담는다
빨리 오시는 눈이나 늦게 오는 눈이
한결같이 큰 꽃 한 송이로 눈꽃 세상 피워낼 때
비로소 불을 켜도 좋은 밤, 그 꽃술 되려고
서걱거리는 얼음 속에 가등들 내걸린다, 바알갛게
이는 여기서도 뒤늦은 사랑이 와서 기웃대므로
더 아득한 곳까지 그리움 지펴지기 때문일까,
이제 겨울밤은 등피처럼 얇아지고
오래 세워둔 내 마음의 발전소를 시큰거리려니
그 캄캄함이 외려 따뜻한 순백을 켜드는 걸,
세상은 한결 새벽으로 기울어져 저 눈발
오래 어루만져 이튿날 아침 햇살 속으로 내보내리라
한 힘이 수만 흰 염소떼 몰고 왔다가
평원 자욱하게 거느리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 폭설 - 복효근 

그 희고 눈부신 것을 온통 이마에 받쳐들고

측백나무 하나 부러질 듯

벌서고 있는

어린

 

대책도 마련 없는

이 그리움의 적설량

 

* 폭설 - 마종기

무엇이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가

깊은 산 속에서 만난 눈사태

앞이 보이지 않게 한점 없이 내리는 꽃잎

눈 내리는 소리는 침묵보다 조용하다

온 몸에 눈 덮고 잠이 드는 나무들

아름다운 것은 조용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간단하다

 

아직 잠들지 못한 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는가

폭설을 핑계 삼아 기대고 다가서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게 서로를 만지는 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큰 눈꽃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용한 것이 무서워진다

저녁이 내리는 우리들이 무서워진다

 

* 도장골시편 -폭설 - 김신용

하반신에 고무타이어를 댄 그림자가 느릿느릿 이어온다 
그 산에 얼마나 큰 눈이 내렸나? 
무릎까지 쌓인 눈, 어제 온종일 퍼부어 내리던 폭설
수의를 덮고 세상은 고요하다 
한국의 수의는 마의(麻衣)이다. 바람이 제 집처럼 드나들어 마치 너와 울타리를 두른 듯 
그 성근 결 속으로 속살까지 내비치는 옷이다 
봄 여름 계절도 없는, 누구나의 것이나 

똑같이 생긴, 세상 끝의 집 
무덤에 묻혔을 때, 다시 무의(無)의 삶 깃들어 저 세월  훠어이 훠어이 걸어가라는 옷이다 
물기만 닿아도 곰삭은 두엄결처럼  올을 풀어  헤치는 그 옷처럼, 눈 녹으면 
세상은, 천지간 너와 울타리를 두른 듯  모습을 나타내겠지만 
그 옷에 담겨, 지상의  마지막 길  걸어가듯 인가(人家)로 내려온 어린 고라니 한 마리 
인적기에 문득 뒤돌아본다. 그 크고 둥근  눈망울에 비친 칡넝쿨 잎 같은 세계 
등 뒤에서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 눈사람처럼 녹아 내린다

 

* 폭설의 기억 - 백상웅

  북받친 사람처럼 눈이 쏟아졌다. 녹슨 용골 드러낸 어선은 급한 마음에 뱃머리를 항구로

돌리고 육지를 밀었다. 눈발은 그대 아픈 곳에 관심도 없어 척추 부러진 어선을 껴안았다.

뼈마디 뚫고 솟아오른 엔진이 늙고 비릿했다.  눈덩이가 기름 때 낀 심장을 철퍽 삼키며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파란 페인트칠 벗겨진 앙상한 배를 하얗게 씹으며,

눈발은 고장난 어선의 멱살을 잡던 쇠줄을 깨물었다.


  백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마을 바깥에 그리운 이 있었지만, 발신음은 산을 넘지

못하고 귓바퀴에 차가운 신호음만 뿌렸다. 귀를 파면 짠한 이름만 묻어나왔다. 주먹 쥐면,

길은 튼 손등처럼 툭 끊어졌다.  그리움도 백년 만에 부러졌을까. 혼자 남을 때,

내 사랑의 방식은 바닥에 깔려 출항을 기다리는 그물이었다. 겨울볕에 누워, 얼고 젖기를

반복하며 어선의 등에 업히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 발자국은 방파제 끝까지 질질 끌려

다녔다. 눈덩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배의 후미는 출렁 가라앉았고, 폐선의 굽은 등에 꽂힌

깃발은 외로운 이의 발자국을 내놓으라는 듯, 하얀 쇠창살에 갇힌 수평선을 그만 놓아주

라는 듯, 온몸으로 울며 눈송이의 귀싸대기를 올리고 있었다. 허공 속에 오롯이 찍혀 있는

눈송이의 발자국, 오래 서 있었기에 단단한 발자국이 먼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

* 백상웅시집[거인을 보았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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