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꽃자리 - 구상

효림♡ 2014. 9. 13. 09:00

* 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

* 조화(造化)속에서 

울밑 장독대를 빙 둘러
채송화가 피어 있다.

희고 연연한 몸매에
색색의 꽃술을 달고
저마다 간드러진 태를 짓고
서로 어깨를 떠밀기도 하고
얼굴을 비비기도 하며 피어 있다.

하늘엔 수박달이 높이 걸리고
이슬이 젖어드는 이슥한 밤인데
막내딸 가슴에 브로치만큼씩 한
죄그만 나비들이 찾아들어
꽃술 위를 하늘하늘 날고 있다.

노랑,
빨강,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이 꽃술에서 저 꽃술로
꽃가루를 옮겨 나르는 나비들!
이른 봄부터 밤마다 새워가며
그 수도 없이 날던 나비떼들!

알록달록 채송화의 꽃물을 들이기에
저 미물(微物)들이 여러 천 년을 거듭하는
억만(億萬)의 역사(役事)를 하였겠구나.

헛간 뒤 감나무의 짓무른 홍시도
입추(立秋) 전까지는 입이 부르트게 떫었으며
저 뒷동산의 밤송이도
가시를 곤두세워 얼씬도 못하게 하더니만
알을 익혀 하강(下降)의 기름칠을 하고는
입을 제 스스로 벌렸다.

오오, 만물은 저마다
현신(現身)과 내일의 의미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지성(至誠)으로 도와
저렇듯 어울리며 사는데


사람인 나 홀로 이 밤
울타리에 썩어가는 말뚝이듯
아무것도 모르며 섰는가 ? *

*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 혼자 논다 

이웃집 소녀가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 갔을 무렵
하루는 나를 보고
ㅡ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
그러길래
ㅡ 유명이 무엇인데?
하였더니
ㅡ 몰라!
란다. 그래 나는
ㅡ 그거 안좋은 거야!
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ㅡ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하고 물었더니
ㅡ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ㅡ 잘 했어! 고마워!
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
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 초토의 시 8 -적군묘지(敵軍墓地)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땅은 30리면

가로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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