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과 나비 - 오규원
나비 한 마리 급하게 내려와
뜰의 돌 하나를 껴안았습니다 *
* 나비 - 신용목
건넛집 마당에 자란 감나무 그림자가 골목 가득 촘촘히 거미줄을 치고 있다
허공에 저 검은 실을 뽑은 이는 달빛인데
겨울밤 낙엽 우는 외진 뒷길에 누구를 매달려는 숨죽인 고요 기다림인가
섶 기운 보따리로 홀아비 자식을 다니러 오는 다 늙은 어미를 노리나
끈 풀린 안전화로 이국의 달력을 찢으러 오는 낯 붉은 사내를 벼리나
건넛집 담에 박힌 소주병 파란 사금파리가 달빛의 낯을 그어 먼 북극에서부터 바람은 차고
달빛이 쳐놓은 허공의 바닥에 오늘은 누구의 울음이 달려 나비처럼 파닥일까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나비 - 김사인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나비 - 송찬호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
* 나비 - 황인숙
나비의 심장은 저토록이나 고요하고
유유히
뱃놀이를 하듯 뛰는구나
늘 낮잠을 자는
구름처럼 뛰는구나
이따금 가느스름 뜨는
커다란 눈처럼 뛰는구나
삽시간, 느리게
새벽과 밤과
아침의 그림자와 오후의 그림자를
오게 했다 지우며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살며시 나비를 잡으면
심장이 멎는다, 정오
나비는 만파 시선을 피하려 쩔쩔매고
나도 쩔쩔매며
그를 본다
손끝 사이로 가뭇없이
빠져나갈 것 같다. 비틀어지거나
나비는 날개에 내 지문을 묻히고
화들짝 날아간다
내 손끝에는
반짝거리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다.
* 나비 - 김춘수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美다.
나비가 앉으면 순간에 어떤 우울한 꽃도 환해지고 多彩로와진다. 變化를 일으킨다. 나비는 福音의 天使다. 일곱 번 그을어도 그을리지 않는 純金의 날개를 가졌다. 나비는 가장 가비야운 꽃잎보다도 가비야우면서 영원한 沈默의 그 空間을 한가로이 날아간다. 나비는 新鮮하다.
* 나비 - 정지용
내가 인제
나비같이
죽겠기로
나비같이
날라 왔다
검정 비단
네 옷 가에
앉았다가
창(窓) 훤 하니
날라 간다 *
* 호랑나비 - 정지용
화구(畵具)를 메고 산을 첩첩(疊疊)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풍이 이울고 봉(峰)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嶺)우에 매점(賣店)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삼동(三冬)내― 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
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았다. 대폭(大幅) 캔바스 우에는 목화(木花)송
이 같은 한떨기 지난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瀑布)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눌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신이 나란히 노힌채 연애(戀
愛)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夕刊)에
비린내가 끼치였다. 박다(博多) 태생(胎生) 수수한 과부(寡婦) 흰얼골이
사 회양(淮陽) 고성(高城)사람들 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賣店) 바깥 주
인(主人)된 화가(畵家)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松花)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비 쌍을 지어 훨훨 청산(靑山)을 넘고.
* 나비 - 복효근
온전히 펼쳤다가 접는데 한 생애가 다 걸린다는 책이라고 한다 그 한 페이지는 하늘의 넓이와 같고 그 내용은 신이 태초에 써놓은 말씀이라고 한다 벌레의 시간과 우화의 비밀이 다 그 안에 있으나 장주莊周도 그것이 꿈엣 것인지 생시엣 것인지 알지 못하고 갔다 하니 내가 무엇을 더 보태어 말하랴 꽃과 더불어 놀고 꿀과 이슬을 먹고 산다 하는 전설도 있다 지금 내 앞에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저 책을 보고 천박하게도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 한 여자의 생을 떠올리고 어깨를 들먹이며 잠시 흐느꼈으니 필시 저 책이 나를 들었다 놓은 것이다 책이 나를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 책이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 나비의 문장 - 안도현
오전 10시 25분쯤 찾아오는 배추흰나비가 있다
마당가에 마주선 석류나무와 화살나무 사이를 수차례 통과하며
간절하게 무슨 문장을 쓰는 것 같다
필시 말로는 안 되고 글로 적어야 하는 서러운 곡절이 있을 것 같다
배추흰나비는 한 30분쯤 머물다가 울타리 너머 사라진다
배추흰나비가 날아다니던 허공을 끊어지지 않도록 감아보니
투명한 실이 한 타래나 나왔다
* 나비 두 마리 - 김광규
빨래 말미도 없이
한 달 내내 쏟아지는 장맛비에
주황색 능소화
아깝게 뚝뚝 떨어졌다
검은 구름 동쪽으로 몰려가며 겨우
앞산의 모습 나타나고 잠시
비가 멎었을 때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니 하얀
나비 두 마리
안쓰럽게 나풀나풀
잡초 우거진 채마밭으로 날아간다
장마철에 잘못 태어나
축축하지 않니
해도 못 보고
꽃도 못 찾고
금방 땅으로 떨어질 듯
서투르게 나풀나풀 날아가는
하얀 나비 두 마리
풋사랑 이루지 못하고 비 맞으며
사라지는 어린 영혼들인가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2]-마음산책
* 나비와 철조망 - 박봉우
지금 저기 보이는 시푸런 강과 또 산을 넘어야 진종일은 별일없이 보낸 것이 된다.
서녘 하늘은 장미빛 무늬로 타는 큰 눈의 창을 열어....
지친 날개를 바라보며 서로 가슴 타는 그러한 거리에 숨이 흐르고
모진 바람이 분다.
그런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싸우는 나비 한 마리의 상채기.
첫 고향의 꽃밭에 마즈막까지 의지하려는 강렬한 바라움의 향기였다.
앞으로도 저 강을 건너 산을 넘으려면 몇 '마일'은 더 날아야 한다. 이미 그 날개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바싹 말라 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敵地).
벽, 벽..... 처음으로 나비는 벽이 무엇인가를 알며 피로 적신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야만 했다. 바람은 다시 분다.
얼마쯤 날으면 아방(我方)의 따시하고 슬픈 철조망 속에 안길.
이런 마즈막 '꽃밭'을 그리며 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슬픈 표시의 벽, 기(旗)여.....
* 나비는 청산 가네 - 김용택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서 나는 섰네
내 맘에 한번 핀 꽃은
생전에 지지 않는 줄을
내 어찌 몰랐을까
우수수수 내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사랑에서 돌아선
내 눈물인 줄만 알았지
그대 눈물인 줄은
내 어찌 몰랐을까
날 저무는 강물에 휠휠 날아드는 것이
꽃잎이 아니라
저 산을 날아가는 나비인 줄을
나는 왜 몰랐을까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서 있네 *
* 김용택시집[참 좋은 당신]-시와시학사
* 나비 - 정호승
누구의 상장(喪章)인가
누구의 상여가 길 떠나는가
나비 한 마리가 태백산맥을 넘는다
속초 앞바다
삼각파도 끝에 앉은 나비
* 나비 - 도종환
나비야 부르니
강아지가 쪼르르
달려나온다
나비야 부르니
고양이가 목 길게 빼고
두리번거린다
나비야 불러도
나비는 보이지 않는 마당에
봄 햇살만 가득하다 *
* 나비 - 김용택
어제 본 들패랭이꽃이
오늘 한낮에 졌다
어제의 기억으로
오늘 허공에 헛앉았다
그 자세로 가는
나비
* 나비 - 신현림
나풀나풀 날아온
나비를 잡고 싶었다
나만큼 작은
나비가 불쌍해서
너풀너풀 날아갈 때까지
그냥 바라만 봤다 *
남계우, '나비', 종이에 채색, 지름 26㎝, 서울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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