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조동화 시 모음

효림♡ 2015. 8. 18. 09:00

*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


* 산도라지꽃

돌돌돌 흘러가는
산개울 앞에 두고

 

어쩌면 희게 희게
닦아온 네 모습이

 

이제 막
속인(俗人)을 보고
파르라니 놀라다 *

 

* 별을 보며

정말 너무 오래 잊은 채 지냈구나
허망한 세상 불빛에 눈 멀고 마음 홀려
밤이면 저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모깃불 밤새 타던 내 어린 고향 마당
은하 이마에 젖는 멍석 위에 누우면
무엔지 그냥 그리워 잠 못 들곤 했더니.

 

채우면 채울수록 허전한 삶에 매여
우러러 넉넉했던 먼 날의 그 순수를
아, 정말 너무나 오래
버려두고 살았구나. *

 

* 소곡(小曲)

썰물이 버리고 간

한 개 빈 소라껍질

 

오가는 발길에나

차이는 줄 알았더니

 

보아라, 달 밝은 이 밤

찰랑찰랑 괸 달빛! *

 

* 강은 그림자가 없다

방치(放置), 장고(長考) 뒤의 눈부신 포석

 

해 아래서는
크든 작든 저마다의 푼수만큼
지난밤 어둔 그늘 한 자락씩 나누어
우리 모두 제 발목에다 아프게
꿰찰 수밖에 없지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누워
온갖 물상(物象)들의 허물 가슴으로 거두며
더욱 낮은 바다를 향해
홀로 제 아픈 등 밀고 가는 강은
그림자가 없다. *

 

* 첫 흔적

큰 바다

밤새도록

타이르고

떠나간 뒤

 

흠과 티

하나 없이

누그러진

가슴팍을

 

도요새

가는 발목이

찍어 넣는

첫 흔적! *

 

* 난마(亂麻)

섣불리 녀석을 풀려고 하지 말라

제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일라치면

난마는 난마와 얼려 더 큰 난마가 될 뿐.

 

녀석을 만나거든 저 홀로 놓아두라

두었다 매정하게 한 번 더 방치하라

마침내 녀석은 지쳐 제 매듭을 풀리니. *

 

* 구절초

봄은

흉내가 역겹고

여름은

자충(自充)이 싫었다

 

저마다

대국(對局)이 끝나

돌아가는

언덕 위에

 

비로소

장고(長考)를 접고

놓아 보는

눈부신

포석(布石)! *

 

* 가을 산을 오르며

익은 열매들이
후둑후둑 떨어져내려
오히려 더 적적한
가을 산을 오르노라면
어디쯤 이승의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한 톨 작은 목숨 위에
크고도 높은 사유(思惟)
투명한 여울 속에 조약돌 드러나듯
하늘 뒤 또 한 세상이
보일 것도 같았다 *

 

* 가을 언덕에서

지는 꽃 피는 꽃이 어우러진 천지간에
주체 못할 기쁨으로 떠나는 신행(新行)이 있고
쓸쓸히 이승을 뜨는 꽃상여도 있어라

 

바위마저 꿰비칠 듯 투명한 이 가을날
익은 상수리 다시 부리께로 놓이는데
목숨이 육신을 벗고 가는 곳은 어디뇨

 

구절초 눈이 부신 맞은편 등성이로
불현듯 적막을 깨고 풀무치 날아간다
미답(未踏)의 그 한쪽 끝을 저는 안다는 듯이 *

 

* 수련(垂連)

먼 하늘 저쪽에도 날 아는 이 있는가

 

오늘 이따금씩 흰 구름이 건너와서

 

몇 송이 환한 안부(安否)를 내 쪽으로 부리네. *

  

* 나이테

씨줄 날줄의 과녁, 천년의 시 영통(靈通)의 삶

 

나무는 나면서부터 그리움을 안고 산다
비 오고 눈 내리고 바람은 드세지만
젖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가슴 속의 동그라미.

 

키가 하늘에 닿고 몸통이 굵어 갈수록
병보다 더 아프게 그리움도 자라난다
한 해에 꼭 한 겹씩만 그려 넣는 고뇌의 무늬.

 

낙뢰(落雷)가 짓이겨도 보여 주지 아니하고
칼이 목을 쳐도 털어놓지 않던 비밀
톱으로 밑동을 잘라야 과녁처럼 떠오른다. *

 

* 영일만(迎日灣)

해안은 둥두렷이

활등인 양 휘어지고

 

수평(水平)은 또 아득히

시위처럼 팽팽한데

 

뉘라서 광명을 쏘아

새아침을 여는고 *

 

* 강가에 앉아

잔잔한 강물 위 허공에 못 박힌 듯
물총새 문득 날아와
정지비행을 한다
팽팽한 일촉즉발의
숨 막히는
한 순간

 

표적이 잡히자마자
온몸을 내리꽂아
홀연히 그 부리로 잡아채는 은비녀,
비린 살 마구 파닥이는
저 눈부신
화두(話頭)여! *

 

* 빛

돌보다 더 단단한 깊음*을 곧장 뚫고

한 차례 굴절도 없이 먼 우주 가로질러

사람들 가슴 가슴에 와 닿는 빛이 있다

 

눈썹 밑 두 눈으론 감지할 수 없는 빛,

바위나 흙벽으로도 가로막지 못하는 빛,

마음눈 밝은 자들이 무릎 꿇고 받는 빛

 

백에 아흔아홉이 감지조차 못 해도

햇빛과 달빛이 아닌, 별빛은 더욱 아닌,

잘 부신 질그릇마다 찰랑찰랑 담기는 빛
 
자그마치 3조 광년 천억 은하 건너와서

굳이 잠긴 빗장을 따 마음 문 열어 젖히고

미망의 어둔 골짝들 비추는 빛이 있다. *

* 우주의 가장자리에 절대온도(-273.15)로 얼어 있다는 거대한 물층

 

* 사랑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기꺼이 종이 되는 일

그리고 또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종이 되고서도
끝끝내 종이 된 줄을 모르는 그 일 *


* 별리(別離)

바라볼 만하거든
개울 하나 두고

손 흔들 만하거든
강물 하나 두고

이도 저도 안 되거든
바다 하나 두고 *


* 우음(偶吟)

해가 서산마루 걸렸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 미처 손도 못 댔는데
고삐 잡혀 등 떠밀려 끌려왔을 뿐인데
벌써 해가 서산마루 걸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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