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
* 방(榜) - 함성호
천불 천답 세우기
내 詩쓰기는 그런 것이다.
* 우주를 건너는 법 - 박찬일
달팽이와 함께!
달팽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도달할 뿐이다
* 눈물 - 정희성
초식동물 같이 착한 눈을 가진
아침 풀섶 이슬 같은 그녀
눈가에 언뜻 비친
* 봄소식 - 정희성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
* 모과 - 서안나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런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다. *
* 노을 - 박현수
저 서쪽
타다 남은 하루치의 울음 소리
* 단풍 - 박현수
떨어진 불꽃은
손아귀를 가만히 오므린다
다음에는
하느님이 떨어질 차례란 듯이
* 입추(立秋) - 석지현
이제 짐을 다 꾸렸으니
다북쑥처럼 흔들리며 떠나려 하네
하얀 가을 먼먼 하늘이여
햇살은 길에 가득 바람 끝에 몰리네
* 아침이슬 - 고은
여기 어이할 수 없는 황홀!
아아 끝끝내 아침이슬 한 방울로 돌아가야 할
내 욕망이여!
* 꽃 - 강은교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 나비 - 손동연
봄이
적어 낸
우표랍니다
꽃에게만
붙이는
우표랍니다.
* 마당 - 박성우
고추밭도 깨밭도 수수밭도 건넌들 논배미도
태풍이 죄다 마당으로 바꿔놓았다
오살, 구천구백구십구 칸 집 짓고 살겄다 *
* 서로가 꽃 - 나태주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나 없을 때 너
보고 싶었지?
생각 많이 났지?
나 아플 때 너
걱정됐지?
기도하고 싶었지?
그건 나도 그래
우리는 서로가
기도이고 꽃이다. *
* 격렬비열도 - 박후기
격렬과
비열 사이
그
어딘가에
사랑은 있다 *
* 하루살이 - 윤석훈
짧다고
말하지 마라
눈물이 적다고
눈물샘이 작으랴 *
* 사막 - 오르텅스 블루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
* 산비둘기 - 장 콕토
두 마리의 산비둘기가 상냥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차마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
* 귀 - 장 콕토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소리를 그리워한다. *
* 뱀 - 장 콕토
아, 참 길구나!
* 국수가 라면에게 - 안도현
너, 언제 미용실 가서 파마했니?
* 그래도 저이는 행복하여라 - 김규동
고향에 가서
아는 이 없다 하더라도
먼 하늘 바라다볼 수 있는 이
앞산 뒷산 바라다보며
옛 생각에 잠기는 이
뛰놀던 언덕 위에 서서
어린 시절 동무들 얼굴
하나하나 떠올리는 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기쁘고 고달팠던 추억에
넋을 잃고 앉았던 저이
행복하여라
저이는 그래도 행복하여라
* 덥고 긴 날 - 조운
찌는듯 무더운 날이
길기도 무던 길다
고냥 앉은 채로
으긋이 배겨 보자
끝내는 제가 못 견디어
그만 지고 마누나.
* 고요가 고요에게 - 김초혜
사위가 텅 비었으나
그 속에 가득 찬 것 있으니
무엇이 부럽다 하겠소
큰 것 중에 가장 크고
작은 것 중에 가장 작은
평생을 구해도 못 구할
이 탐스런 꽃 *
* 그리움 - 신달자
내 몸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
휘몰아 너에게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 이동 *
* 피아노 -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
* 어둠이 되어 - 안도현
그대가 한밤내
초롱초롱 별이 되고 싶다면
나는 밤새도록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대의 등 뒤에서
어둠이 되어 주겠습니다. *
* 미안한 일 - 김사인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튀어나오도록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멋쩍은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
* 그날 - 곽효환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
* 곽효환시집[슬픔의 뼈대]-문지
* 강촌에서 - 문태준
말수가 아주 적은 그와 강을 따라 걸었다
가도 가도 넓어져만 가는 강이었다
그러나 그는 충분히 이해되었다 *
* 문태준시집[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