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 왔다 - 오규원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 *
* 가을은 - 정완영
가을은 질그릇 굽듯 하루하루를 구워낸다
풀끝에 풀씨 같은 것 꼭 그런 것 말고라도
절로는 금이 간 가슴, 고향 생각 뭐 그런 것
설사 세월이야 강물이라 할지라도
한번 흘러 다시 못 오는 강물이라 할지라도
가을은 흐르는 강나루 나룻배쯤 뒀나부다
넉새베 무명실 같은 눈물 말린 구름 같은
그 세월 나루터에도 나룻배는 있었던가
아내는 억새풀 친정의 성묘 길을 가겠단다
백 리 밖 陳머리엔 기러기 왔다는데
칼 짚은 산하에도 흩어지는 가을 바람
가을은 강물도 구워 한바다로 보내누나
잠자리 한 마리가 감나무 가지 끝에 앉아
종일 졸고 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차가운 소나기가 가지를 후려쳐도
옮겨 앉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
거기 그대로 그만 아슬히 입적하시었다 *
* 가을의 소원 - 이시영
내 나이 마흔일곱,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
* 이시영시집[사이]-창비,1996
* 이 가을에 오신 손님 - 서정주
이 가을에 오신 손님 이 세상에서
제일로 쓸쓸한 신발을 신고,
이 가을에 오신 손님 이 세상에서
한 송이 코스모스 얼굴이 되네
이 가을에 오신 손님 이 세상에서
또다시 저 혼자서 떠나서 가네.
귀뚜리 울음소리 바지로 꿰고
기러기 울음소리 웃옷을 입고,
흰 구름의 벙거지 머리에 쓰고
또 떠나가네 또 떠나 떠나서 가네.
옛날에 도망쳐온 흰말 한 마리
서성이며 헤매듯이 또 떠나가네
*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 이준관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시골 버스를 탄다
시골버스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황토흙 얼굴의 농부들이
아픈 소는 다 나았느냐고
소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낯모르는 내 손에
고향 불빛 같은 감을
쥐어주기도 한다.
콩과 팥과 고구마를 담은 보따리를
제 자식처럼 품에 꼭 껴안고 가는
아주머니의 사투리가 귀에 정겹다.
창문 밖에는
꿈 많은 소년처럼 물구나무선
은행나무가 보이고,
지붕 위 호박덩이 같은 가을 해가 보인다.
어머니가 싸주는
따스한 도시락 같은 시골 버스.
사람이 못내 그리울 때면
문득 낯선 길가에 서서
버스를 탄다.
하늘과 바람과 낮달을 머리에 이고 *
비구니 선방의 섬돌 위에
가지런한 치아처럼 놓인 고무신
그 곁에, 입을 쩍 벌린 운동화가
수행 중인 고무신에게 말 걸고 있다
가끔, 그들의 대화가 창호지에 수런수런 와 닿고
반쯤 물든 감이파리가 섬돌 위에 떨어져 머문다
그들의 사연이 괜히 궁금해져서
내 마음 속의 갈대밭에 바람이 분다 *
* 가을 울림 - 고창영
낙엽 지는
오동나무와 밤나무 사이를 걷다가
나직한 거문고 소리 듣는다
명주실 같은
바람줄이 내 놓는
가을 건너는 소리
* 가을 들 - 신달자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하고 다시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극도로 예민해진 저 종이 한 장의 고요
바람도 다소곳하게 앞섶 여미며 난다
실상은 천년 인내의 깊이로 너그러운 품 넓은 가슴
나는 것의 오만이 어쩌다 새똥을 지리고 가면
먹물인가 종이는 습자지처럼 쏘옥 받아들인다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다 받아주는데도 단 한 발자국이 어려워
입 닫고 고요히 지나가려다 멈칫 서 떨고 있는 초승달. *
* 가을은 - 유종인
전생(前生)의 빚쟁이들이 소낙비로 다녀간 뒤
내 빚이 무엇인가
두꺼비에 물어보면
이 놈은 소름만 키워서
잠든 돌에
비게질이다
단풍은 매일 조금씩 구간(舊刊)에서 신간(新刊)으로
한 몸을 여러 몸으로 물불을 갈마드는데
이 몸은
어느 춤에 홀려
병든 피를
씻기려나
추녀 밑에 바래 놔둔 춘란 잎을 어루나니
서늘타, 그 잎 촉(燭)들!
샛강물도 서늘했겠다
막걸리 몇 말을 풀어서
적막 강심(江心)을
달래야겠다
* 얼큰한 시월 - 전영관
작년에 나, 뺨 맞았잖아
장성댐이 깊기는 깊더구만 가을이 통째로 빠졌는데 흔적 없고
조각구름만 떠다니더군 백양사 뒷산 정도야 그 남색 스란치마에 감기면
깜박 넘어가지 않겠어 뛰어들까 싶기도 한데
집사람 얼굴이 덜컥 뒷덜미를 채더군
피라미 갈겨니 메기까지 푹푹 고아
수제비도 구름같이 떠오르는 어죽(魚粥) 한 사발 했지
반주로 농탁(農濁) 몇 대접 걸쳤다가 휘청
단풍에 취한 낭만파처럼 평상에 누웠던 거 아닌가
목침 베고 한 잠 늘어진 뒤 화장실에 가보니 아 글쎄
벌건 뺨에 손자국 선명한 거라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 대고 누워
잠시 딴살림 차렸던 거라 뭣에 쫓기기는 한 듯
뒷골 얼얼하니 내려오는 내내 흙길도 출렁거리더군
오늘 나, 거기로 뺨 맞으러 간다
혼자 쓸 한나절쯤 배낭에 챙겨 넣고 지팡이 들고
는실는실 웃는 고것들 후리러 간다 농탁(農濁)에 엎어진 핑계로
작년처럼 낮잠 한 숨 퍼지르고 올 참이야 한쪽 뺨 벌겋게 얻어터져야
후끈한 뒷맛으로 올 겨울 얼음고개 넘지 않겠나 *
* 가랑잎 무게 - 유재영
1
내 또래 그 가을을 보고 싶어 찾았더니 귀룽나무 어디에도 친구는 간데없고 파랗게 여문 하늘만 끌어안고 왔습니다
2
열매주(酒) 한 병 들고 다시 찾은 그 가을 어느새 그도 나도 얼룩진 나이라서 받아 든 가랑잎 무게 도로 내려놓습니다 *
* 가을 소묘 - 함민복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 함민복시집[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 창비
* 만추 - 이재무
가을은 오랑캐처럼 쳐들어와 나를 폐허로 만들지만 무장해제 당한 채 그저, 추억의 부장품마저 마구 파헤쳐대는 무례한 그의 만행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나는 서러운 정서의 부족이다. *
* 늦가을 - 안상학
그만하고 가자고
그만 가자고
내 마음 달래고 이끌며
여기까지 왔나 했는데
문득
그 꽃을 생각하니
아직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내가 보이네 *
* 안상학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2014
* 맨드라미와 나 - 김경미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면 두통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
온통 붉다 못해 검다
곧 서리 내리고 실내엔 생선 굽는 냄새
길에는 양말 장수 가득할 텐데
달력을 태우고 달걀을 깨고 커튼에 커튼을 덧대고
혀의 온도를 올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간다
가을은 떠나고
오늘 밤 우리는 함께 울 것이다 *
* 김경미시집[밤의 입국 심사]-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