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 - 고은
이미 우리에게는
태어난 곳이 고향이 아니다
자란 곳이 고향이 아니다
산과 들 달려오는
우리 역사가 고향이다
그리하여 바람찬 날
우리가 쓰러질 곳
그곳이 고향이다
우리여 우리여
모두 다 그 고향으로 가자
어머니가 기다린다
어머니의 역사가 기다린다
그 고향으로 가자 *
* 고향 - 백석
나는 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느 아침 醫員을 뵈이었다
醫員은 如來같은 상을 하고 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故鄕이 어데냐 한다
平安道 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氏 故鄕이란다
그러면 아무개氏 아느냐 한즉
醫員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醫員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 故鄕 -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을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 故鄕 - 김소월
1
짐승은 모를는지 고향인지라
사람은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하던 것
잠들면 어느덧 고향입니다
조상님 뼈 가서 묻힌 곳이라
송아지 동무들과 놀던 곳이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아 꿈에서는 항상 고향입니다
2
봄이면 곳곳이 산새소리
진달래 화초 만발하고
가을이면 골짜구니 물드는 단풍
흐르는 샘물 위에 떠나린다
바라보면 하늘과 바닷물과
차 차 차 마주붙어 가는 곳에
고기잡이 배 돛 그림자
어기여차 디여차 소리 들리는 듯
3
떠도는 몸이거든
고향이 탓이 되어
부모님 기억 동생들 생각
꿈에라도 항상 그곳서 뵈옵니다
고향이 마음속에 있습니까
마음속에 고향도 있습니다
제 넋이 고향에 있습니까
고향에도 제 넋이 있습니다
마음에 있으니까 꿈에 뵈지요
꿈에 보는 고향이 그립습니다
그곳에 넋이 있어 꿈에 가지요
꿈에 가는 고향이 그립습니다
4
물결에 떠내려간 부평 줄기
자리잡을 새도 없네
제자리로 돌아갈 날 있으랴마는!
괴로운 바다 이 세상에 사람인지라 돌아가리
고향을 잊었노라 하는 사람들
나를 버린 고향이라 하는 사람들
죽어서만은 천애일방(天涯一方) 헤매지 말고
넋이라도 있거들랑 고향으로 네 가거라 *
* 김소월시집[진달래꽃]-미래사
* 고향 - 노천명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 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훗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斑馬, 얼룩말)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 고향 - 김광균
하늘은 내 넋의 슬픈 고향
늙은 홀어머니의 지팽이같이
한 줄기 여윈 구름이 있어
가을바람과 함께 소슬하더라.
초라한 무명옷 이슬에 적시며
이름 없는 들꽃일래 눈물지었다.
떼지어 우는 망아지 등 너머
황혼이 엷게 퍼지고
실개천 언덕에 호롱불 필 때
맑은 조약돌 두 손에 쥐고
노을을 향하여 달리어갔다.
뒷산 감나무꽃 언제 피었는지
강낭수수밭에 별이 잠기고
한 줄기 외로운 모깃불을 올리며
옷고름 적시시던 설운 뒷모습
아득―한 시절이기 더욱 그립다.
창망한 하늘가엔 나의 옛 고향이 있어
마음이 슬픈 날은 비가 내린다.
* 고향 - 김규동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戀情)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을 둘르고 돌아 앉아서
산과 더불어 나이를 나이를 먹어가는 마을.
마을에선 먼 바다가 그리운 포플러나무들이
목메어 푸른 하늘에 나부끼고,
이웃 낮닭들이 홰를 치며
한가히 고전(古典)을 울었다.
고향엔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고향 - 곽재구
흐린 새벽
감나무골 오막돌집 몇 잎
치자를 등불 켜고 산자락에 모이고
깜장 구들 몇 장 서리 내린
송지댁네 외양간
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
콩대를 다독이며 쇠죽을 쑤고
약수골 신새벽 꿈길을 출렁이며
송지덕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
에헤라 나는 보지 못했네
에헤라 나는 듣지 못했네
손시려 송지댁 구들 곁에 쭈그린 동안
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
생솔 부지깽이 아내에게 넘겨주고
쓱싹쓱싹 함지박의 쌀 씻는 모습
쪼륵쪼륵 양은냄비에 뜨물 받는 소리
에헤라 대학 나온 광주 양반에게서도
에헤라 유학 마친 서울 양반에게서도
나는 보지 못하였네
듣지 못하였네.
* 고향 - 박용철
고향은 찾아 무얼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무너진 데
저녁 까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도 옛 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 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 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하리.
하늘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 보랴
남겨 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 고향 - 김후란
내 마음 나직한 언덕에 조그마한 집 한 채 지었어요.
울타리는 않겠어요.
창으로 내다보는 저 세상은 온통 푸르른 나의 뜰
감나무 한 그루 심었어요
어머니 기침 소리가 들려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깊어 가는 고향집.
* 고향 - 김용택
한번 왔다 가는 이 세상
살면은 얼마나 살겠다고
울고 갔던 타관길
들꽃 피는 고향길에
꽃상여로 왔구나
앞산 뒷산 오동동
오동꽃이 피어
흰나비 노랑나비 훨훨 날아
이 건너 저 건너 물 건너
이 산 저 산 청산을 나는데
한번 왔다 가는 저 세상
잘 가소, 잘 있으소 눈짓도 없이
물 건너 저 건너
녹수야 청강 건너서
오월 청산을 가는구나
저 세상에 드는구나.
* 고향 - 나태주
바람이 다르다
내 코만이 아는 아, 풀비린내.
* 내 고향은 - 나태주
내 고향은
산, 산
그리고 쪽박샘에
늙은 소나무,
소나무 그림자.
눈이 와
눈이 쌓여
장끼는 배고파
까투리를 거느려
마을로 내리고,
눈 녹은 마당에서
듣는
솔바람 소리.
부엌에서 뒤란에서
저녁 늦게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 추석 고향집 - 정군수
고향집 우물가 놋대야에는
그 옛날의 보름달이 뜨고 있으리
흰 고무신 백설 같이 닦아내던 누이
손끝 고운 그리움도 남아 있으리
눈엔 듯 보이는 듯 뒤안길 서성이면
장독대에는 달빛 푸르던 새금파리
어머니의 눈에 비친 안쓰러움도
오늘밤엔 기다림으로 남아 있으리
굴렁쇠 안에 뜨는 둥근 보름달
고샅길 이슬 맞고 달려오면은
달빛 받아 피어나던 할아버지 수염
박꽃 같은 웃음도 남아 있으리 *
* 추야우중(秋夜雨中) - 최치원
秋風唯苦吟 - 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 -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 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 - 등전만리심
-
가을 바람에 홀로 시를 읊으니
세상에 내 마음 아는 이 없네
창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등 앞에 앉은 이내 마음은 만리고향으로 달리네. *
* 봉사일본(奉使日本) - 정몽주
水國春光動 - 수국춘광동
天涯客未行 - 천애객미행
草連千里綠 - 초련천리록
月共兩鄕明 - 월공양향명
遊說黃金盡 - 유세황금진
思歸白髮生 - 사귀백발생
男兒四方志 - 남아사방지
不獨爲功名 - 부독위공명
-
섬나라에 봄이 돌아와도
나는 하늘 끝에 떠도는 나그네
풀은 천리만리 짙푸르고
저 달은 두 나라를 비추누나
일본을 달래며 황금은 스러지고
돌아갈 이내 몸에는 흰 머리만 나누나
아, 사나이 품은 큰 뜻은
사방에 이름을 떨치는 이것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