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시(詩) 시 모음

효림♡ 2015. 10. 5. 08:30

* 詩 - 이시영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 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

 

* 시를 찾아서 - 이시영

벼랑에서 한발 성큼 내딛다가 하늘 허공에 아스라이 걸린 심허사 한 채,

내 오늘 그 절을 찾아 저 짙푸른 태산준령을 넘어야겠다. *

 

* 시 - 최동호

별 없는 캄캄한 밤
유성검처럼 광막한 어둠의 귀를 찢고 가는 부싯돌이다 *

 

* 시 -어머니학교10 - 이정록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

 

* 詩 - 김용택 

  아침에 일어나 앉아 신문을 펼친다 신문지에 박힌 모든 글

자들이 허물어져 흩어지더니,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줄을 지

어 찢어진 장판지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순식간이다 꾸물거리

며 제일 늦게 들어가는 글자 하나를 얼른 잡아 텅 빈 휜 종이

위에 놓는다 '詩' 자다 *

* 김용택시집[그래서 당신]-문학동네

 

* 시 - 김용택 
겨울 달빛으로 시를 썼다
밤새가 운다고
추운 물소리가
내 가슴을 파고든다고
달이 자꾸 가고 있다고
언 손을 부비며
겨울 달빛으로 시를 썼다
달빛에 목이 마르면
꽝꽝 언 마당을 밟고
텃밭에 나가
어두운 무 구덩이 속에서
무를 꺼내다가 깍아 먹었다
바람 든 무를 베어 물 때마다
이가 시리고
흰 무에 빨간 피가 묻어 났다
어둡고 캄캄한 무 구덩이 속에서는
무순이 길어나고

긴 겨울밤
휘몰아쳐 오는 외로움과 적막,
그렇게 나도 어둠을 뚫고 빛을 찾았다

시가 내 빛이었다
시가 어둠 속에서 나를 찾는 흰 손이었다

 

* 시 -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

 

* 詩 - 최영미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 문장으로 똑 떨어지는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채이면
쩔렁! 하고 가끔씩 소리내어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

* 최영미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1994


* 시(詩)를 찾아서 - 정희성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면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 詩 - 우대식
시는 나를 일찍 떠난 어머니였으며
왜소했던 아버지의 그림자였으며
쓸쓸한 내 성기를 쓰다듬어 주던 늙은 창녀였으며
머리에 흐르던 고름을 짜주던 시골 보건소 선생이었다
시는
마당가에 날리는 재灰였으며
길을 잃고 강물 따라 흐르는 밀짚모자였다
폭풍전야, 풀을 뜯는 개였으며
탱자나무 가시 아래 모인 새이기도 하였다
늘 피가 모자라 어지러워하던
한 소년이 주먹을 힘껏 모았다 피면
가늘게 떨리는 정맥
그 곳에 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현대시학 2013 8월호

 

* 시, 부질없는 시 - 정현종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 시를 기다리며 - 정현종  

시 안 써지면

그냥 논다

논다는 걱정도 없이

논다

놀이를 완성해야지

무엇보다도 하는 짓을

완성해야지 소나기가

자기를 완성하고

퇴비가 자기를 완성하고

허기(虛飢)가 자기를 완성하고

피가 자기를 완성하고

연애가 자기를 완성하고

잡지가 자기를 완성하고

밥이 자기를 완성하듯이

 

죽음의 태(胎)속에

시작하는 번개처럼 *

* 정현종시집[떨어져도 튀는 공처럼]-문지,1984

 

*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 정희성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 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
 

-이상국의 시「그늘」의 첫 행.

 

* 그늘 - 이상국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새들도 갈 데가 있어 가지를 떠나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하다//

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다 *

 

* 시(詩) - 황인숙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박완서

 

프라다, 카르티에, 지방시, 구찌

아르마니, 베르사체, 이브생로랑

그 외 내가 계보도 모르고

유행도 모르고 가치도 모르고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의 시들

그녀의 시들, 그녀를

허황되고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네
백화점 명품관은 그녀의 시집

때때로 그녀는 삶을 고양시키려

그곳을 기웃거리네

장미 향수 시의 향기를 주위에 흩뿌리며 유유히

그러나 속곳까지 시로 무장하고

매처럼 그녀의
아무것도 놓치지 않네
허황되고도 아름다운 그녀
그녀의 머리는 시로 가득하네.

 

* 시 - 박정대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사랑할 때만 실체가 돋아나는 종족이 있다, 그들이 속삭이는 언어는 시에 가깝다

     *

오늘은 나뭇잎 몇 개 노오랗게 물들어 가고 있다, 저것이 급진 오랑캐들이다

오늘은 떨어지는 나뭇잎 몇 개 밟으며 새 한 마리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다, 저것이 오랑캐의 유일한 영혼이다

    *

시, 검은 스웨터를 입은 새

 

 

* 詩 - 함민복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生과 견주어보아도
詩는 삶의 蛇足에 불과하네
허나,
뱀의 발로 사람의 마음을 그리니
詩는 사족인 만큼 아름답네

 

* 시(詩) 통장 - 천양희 

시를 쓰니 세상에 빚 갚은 것이고
의지할 시를 자식처럼 키우니 저축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시시시(時視詩) 가득한 통장에
마이너스는 없다네

詩앗 뿌렸으니 세상에 보시하는 것이고
시 한 섬 거두었으니 추수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시시시 가득 찬 통장에
마이너스는 없다네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고
시라는 씨앗 하나 남겨 주었다네
그래서 시 통장에
시인이란 없다네 *
 

* 천양희시집[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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