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사인 시 모음 2

효림♡ 2015. 10. 14. 09:00

* 달팽이 -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처럼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

 

*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

 

* 매미

모과나무 우듬지에 매미 하나 붙어 운다. 

끝나지 않을 오포(午砲)소리같이 캄캄하다.

 

길게 자지러지는 아이 울음 뒤로

살색 흰 여자가 떠나고

눈을 훔치는 손등에도 땡볕 캄캄하다.

 

굴속 같던 울음이 찌르찌르 개자

잠시 세상이 밝아진다.

 

더위에 지친 머위잎들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저물기를 기다린다.

 

어두운 부뚜막과

생솔가지 매운 연기의

멀건 호박풀때의 저녁이

천천히 그 위로 내리곤 했다. *

 

* 목포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나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가리라.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낸 채 흰 목을 젖히고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것이, 아내여 꼭 나쁘달 일인가.


밖에는 바람 많아 배가 못 뜬다느데

유달산 밑 상보만 한 창문은 햇빛으로 고요하고

나는 이렇게 환한 자부럼 사이로 물길을 낸다.

시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는 가야 하리라.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퉁퉁배를 타고 꼭 한번은 가닿아야 하리라

코와 귀가 발갛게 얼어서라도. 

 

* 첫차

차라리 귀가 없었으면 싶었다.

동틀녘 바람 맵고

턱이 굳어 말도 안 나오던

두산 삼거리

언 발로 얼음을 구르며 차를 기다렸다.

광목 수건을 꽁꽁 동이며

 

젖이 분 새댁은 주막집 부엌에 들어가

울며 아픈 젖을 짜내고

흐른 젖에서는 김이 오르고

김치 그릇 미끄러지는 밥상을 든

어린 식모는 손등이 터졌다.

 

 내다보는 눈이 아릴 때까지

보은 가는 첫차가 오지 않았다.

 

* 사바(娑 

이것으로 올해도 작별이구나.

 

풀들도 주섬주섬 좌판을 거두는 외진 길섶

어린 연둣빛 귀뚜리 하나를(생후 며칠이나!)

늙은 개미가 온 힘을 다해 끌고 간다.

가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아직 산 놈이면 봐주는 게 어떻겠는가,하자

한사코 죽은 놈이라 우긴다.

 

놓지 않는다. *

* 에이 시브럴

몸은 하나고 맘은 바쁘고

마음 바쁜데 일은 안되고

일은 안되는데 전화는 와쌓고

땀은 흐르고 배는 고프고

배는 굴풋한데 입 다실 건 마땅찮고

그런데 그런데 테레비에서

<내 남자의 여자>는 재방송하고

그러다보니 깜북 졸았나

한번 감았다 떴는데 날이 저물고

아무것도 못한 채 날은 저물고

 

바로 이때 나직하게 해보십지

'에이 시브럴'

양말 벗어 팽개치듯 '에이 시브럴-'

자갈밭 막 굴러온 개털 인생ㅊ럼

다소 고독하게 가래침 돋워

입도 개운합지 '에이 시브럴-'

갓댐에 염별에 ㅈ에 ㅆ,쓸 만한 말들이야 줄을 섰지만

그래도 그중 인간미가 있기로는

나직하게 피리 부는 '에이 시브럴-'

(존재의 초월이랄까 무슨 대해방 비슷한 게 거기 좀 있다니깐)

얼토당토않은 '에이 시브럴-'


마감 날은 닥쳤고 이런 것도 글이 되나

크게는 못하고 입안으로 읊조리는

'에이 시브럴-' 

* 비둘기호

여섯살이어야 하는 나는 불안해 식은땀이 흘렀지.

도꾸리는 덥고 목은 따갑고

이가 움직이는지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검표원들이 오고 아버지는 우겼네.

그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사정했네.

땟국 섞인 땀을 흘리며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는 오줌이 찔끔 나왔네.

커다란 여섯 살짜리를 사람들은 웃었네.

 

대전역 출찰구 옆에 벌세워졌네.

해는 저물어가고

기찻길 쪽에서 매운바람은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한 얼굴로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눈을 보냈네.

섧고 비참해 현기증이 다 났네.

 

아버지가 사무실로 불려간 뒤

아버지가 맞는 상상을 하며

찬 시멘트 벽에 기대어 나는 울었네.

발은 시리고 번화한 도회지 불빛이 더 차가웠네.

 

핼쑥해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두운 역사를 빠져나갔네.

밤길 오십리를 더 가야 했지.

아버지는 젊은 서른여덟 막내아들 나는 홑 아홉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설 쇠고 올라오던 경부선 상행. *

* 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 가을 날

좋지 가을곁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 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 극락전

처마 밑에 쪼그려

소나기 긋는다

 

들어와 노다 가라

금칠갑을 하고 앉아 영감은

얄궂게 눈웃음을 쳐쌌지만

 

안 본 척하기로 한다

빗방울에 간들거리는 봉숭아 가는 모가지만 한사코 본다

 

텃밭 고추를 솎다 말고

종종걸음으로 쫓아와 빨래를 걷던

옛적 사람 그이의 머릿수건을 생각한다

부연 빗줄기 너머

젊던 그이 *

 

* 화양연화(花樣年華)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궃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어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 무릎 꿇다 

뭔가 잃은 듯 허전한 계절입니다.

나무와 흙과 바람이 잘 말라 까슬합니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옛 어른들처럼 찬탄하고 싶습니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습니다.

 

고요한 곳으로 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흘러온 철부지의 삶을 뉘우치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습니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속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별빛 총총해질 때까지 *

 

* 김사인시집[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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