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만추(晩秋) 시 모음

효림♡ 2015. 11. 6. 08:30

* 만추 - 이재무 

  가을은 오랑캐처럼 쳐들어와 나를 폐허로 만들지만 무장

해제당한 채 그저, 추억의 부장품마저 마구 파헤쳐대는 무례한

그의 만행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나는 서러운

정서의 부족이다. *

 

* 만추 - 노천명
가을은 마차를 타고 달아나는 신부
그는 온갖 화려한 것을 다 거두어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하늘은 더 아름다워 보이고
대기는 한층 밝아 보입니다

한 금 한 금 넘어가는 황혼의 햇살은
어쩌면 저렇게 진줏빛을 했습니까
가을 하늘은 밝은 호수
여기다 낯을 씻고 이제사 정신이 났습니다
은하와 북두칠성이 맑게 보입니다

비인 들을 달리는 바람소리가
왜 저처럼 요란합니까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가지고
가는 것이 아닐까요

 

* 만추유감(晩秋有感) - 오탁번

굴뚝의 따뜻한 그을음 찾아드는
텃세의 날갯짓 소리
더욱 가볍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반쯤은 까치에서 파먹힌 채
목숨 다하는 까치감과도 같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은
가을 깊어질수록
또 낙하하기 시작한다
이 깊은 밤의 寢寞은
오직 하나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눌 수 없는
果肉과 果實로도 나눌 수 없는
오직 하나
그리움뿐이다
다 저문 가을 들녘
밭두럭에 알을 까며
마지막 숨을 쉬는
풀무치의 울음뿐이다

 

* 만추(晩秋) - 이용악

노오란 은행잎 하나
호리호리 돌아 호수에 떨어져
소리 없이 湖面을 미끄러진다
또 하나 ----

조이삭을 줍던 시름은
요즈음 낙엽 모으기에 더욱더
해마알개졌고

하늘
하늘을 쳐다보는 늙은이 뇌리에는
얼어죽은 친지 그 그리운 모습이
또렷하게 피어오른다고
길다란 담뱃대의 뽕잎 연기를
하소에 돌린다

돌개바람이 멀지 않아
어린것들이
털 고운 토끼 껍질을 벗겨
귀걸개를 준비할 때

기름진 밭고랑을 가져 못 본
부락민 사이엔
지난해처럼 또또 그 전해처럼
소름 끼친 대화가 오도도오 떤다

 

* 만추(晩秋), 부석사 -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을 안고서
그대와의 사랑이
수태된 날을 떠올린다.
사랑이여,
예까지 오는 동안 새가 울어
산 푸르러지고
산 붉어지던데
나 혼자 세상을 떠나는 걸음걸이로
이 고적한 사찰을 들어
그대와의 둥글었던 사랑을
껴안고 눈물 흘린다.
내가 그대를 안아
그대 날 임신해
배불러지던 아름다운 날들이
보라, 단풍진다.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날아가고 떨어져
수북수북 쌓인다.

 

* 깊은 가을 - 도종환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비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

 

만추 - 배한봉  

열매를 달지 못하는 나무는
하늘로 팔을 쳐들고 벌을 쓰지만
열매를 단 나무는
팔을 늘어뜨린 채 출렁인다

 

보아라, 악착같이 매달린
살찐 열매들 건사하느라
뼈마디마다 힘을 꽉 주고 있는 나무들
햇빛이 눈부신 것은 열매 때문이 아니라
무겁게 휘늘어진 저,
영혼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세상에서 제일 힘센 팔 다리를 만난 거다
노동의 순결을 아는 자만이
가 닿을 수 있는 나무의 나라
아, 나는
감은 따지 못하고
눈만 자꾸 비비고

 

* 만추(晩秋) - 나상국  

가을 햇볕이

빗질을 하는

가을 공원의

오후 한나절

쪼그려 앉았다가

길게 드러누운

벤치 그림자 옆

 

바닥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빨간 단풍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나온 바람에

찰랑거리는 저 햇빛 좀 봐

 

원앙새 한 쌍

한가로이 자맥질을

즐기는 호수 위

작은 파문에 일렁이는 물살

납작 엎드려 노 저어가는

노란 은행잎을 봐

 

수심 깊은 곳으로

파란 하늘

텀벙 뛰어들어

단풍구경에 열중하네 

 

* 농가의 이런저런 일을 읊다(田家雜詠) - 황오

시골집이 조그맣게 밭사이 있어,

감 대추와 밤나무로 둘리어 있네

서릿바람 불어와 무르익으니,

말과 소의 눈에는 온통 붉은빛.

* 과천가는 길에 - 이덕무

비둘기는 서리맞아 털빛이 윤기나고,

기러기는 추위 피해 모습 막 감도누나

솔장승은 벼슬했나

머리에 모자썼고,

돌부처는 남자건만 입술 붉게 칠하였네.

* 晩秋 - 李德懋[조선]  

秋日不勝淸

手整葛聽水聲

案有詩篇籬有菊

人言幽趣似淵明 

* 늦가을  

작은 서재에 찾아온 가을날이 너무도 맑아

손으로 갈포 두건 바로잡고 물소리를 듣네

책상에 시편 있고 울타리엔 국화 피었으니

사람들은 이 그윽한 멋을 도연명 같다 말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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