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팽이 - 정호승
집을 등에 지고 가는 그를 밟지 마시라
살짝만 밟아도 으깨지는 그를 그대로 두시라
그는 집을 별이라고 생각하고
별을 가볍다고 생각할 때가 있으므로
서울역 대합실이든 지하철 통로이든
기어가거나 걸어가거나
누구나 가는 길의 끝은 다 눈물의 끝이므로
봄비가 오고 진달래가 피어도 그냥 두시라
그는 배가 고파도 배가 부를 뿐
이미 진 꽃을 다시 지게 할 뿐
기어간 길을 또 기어갈 뿐
그래도 어머니는 그에게 기어가는 자유와
가끔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주셨으니
비록 여름에 밭을 갈고
가을에 씨를 뿌린다 할지라도
밟지 마시라
봄비에 젖은 집을 등에 지고 술 취해
비틀비틀 기어간다 할지라도 *
* 정호승시집[여행]-창비
* 달팽이 - 이향아
아침 풀밭을 걷다가
달팽이를 밟았습니다.
크레카 부서지는 소리
흙발로 밟아
죄짓는 소리
우주의 천장이
내려 앉았습니다.
벗겨진 하늘
드러난 맨몸뚱이,
쏟아지는 빛이며 아우성이며
나는 춥고 어지러워
몸을 움츠리었습니다.
동서남북 어디로 갈까
그 자리에 눈감고
주저앉았습니다.
* 달팽이 - 최두석
임진강물이 역류해 들어오는 문산천, 초병의 총구가 무심히 햇빛에 빛나는 유월 어느날, 기슭에 수양버들 한 그루, 그 아래 화강암 돌비 하나, 너무 한적해서 간혹 물거품을 터뜨리는 냇물 속에 조용히 잠겨 있던 달팽이 무리, 그 달팽이 무리가 뻘흙 위로 상륙한다.
굼실굼실 기슭의 수양버들 밑둥으로 기어오른다. 제각기 등에 집을 진 채 동둑으로 뻗은 밋밋한 가지를 타고 달팽이의 느릿한 행렬이 이어진다. 마침내 가지 끝에서 온몸을 집 속에 감추고 굴러 떨어진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달팽이는 계속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쥐고 떨어진다. 버들가지 속잎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는 그 아래 풀밭에 떨어진 놈은 다시 물을 찾아 굼실거리고 돌비 위로 떨어진 놈은 당장 깨져 죽는다. 달팽이의 시신이 널어 말려지는 돌비, 돌비에는 핏빛 글씨로 `간첩사살기념비`라 씌여 있다. 그때 초병이 걸어와 돌비 앞에서 거수경례를 붙이고 그의 군화 밑에는 굼실거리던 달팽이 몇 마리 깔려 있다. *
* 최두석시집[성에꽃]-문지
* 달팽이 - 정호승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
* 달팽이 - 도종환
새순이 푸른 이파리까지 가기 위해
하루에 몇 리를 가는지 보라
사과나무 꽃봉오리가 사과 꽃으로
몸 바꾸기 위해 하루에
얼만큼씩 몸을 움직이는지 보라
속도가 속도의 논리로만 달려가는 세상에
꽃의 속도로 걸어가는 이 있다.
온몸의 혀로 대지를 천천히 핥으며
촉수를 뻗어 꽉 찬 허공 만지며
햇빛과 구름 모두 몸에 안고 가는 이
우리도 그처럼 카르마의 집 한 채 지고
아침마다 문을 나선다.
등짐 때문에 하루가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짐에 기대 잠시 쉬기도 하고
이 짐 아니었으면 얼마나 허전할까 생각하면서
우리도 겨우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아름다움도 기쁨도 벗어 버릴 수 없는
등짐의 무게 그 깊은 속에 있다는 걸
온 몸으로 보여주며
오늘도 달팽이는 평온한 속도로
제 생을 옮긴다.
* 달팽이 - 김제현
경운기가 투덜대며
지나가는 길섶
시속 6m의 속력으로
달팽이가 달리고 있다.
천만 년 전에 상륙하여
예까지 온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산달팽이 한 마리
쉬임없이 가고 있다.
조금도 서두름 없이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
* 김제현시집[풍경]-시인생각
비오는 날은
나를 설레게 해요
돌층계 위에서
꿈을 펼치다가
잎새에 묻은 빗방울도 핥으며
사는 게 즐거워요
동그란 집 속에
몸을 깊이 감추어도
마음은 닫지 않아요
언젠가는 풀기 위해
감아 두는 나의 꿈
넓은 세상도
사람들도
더욱 잘 보이는
비 오는 날
빗방울 끝에 맺히는
기도의 진주 한 알
미묘한 집 속에
숨어 살아도
늘 행복해요
* 달팽이의 사랑 -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
* 김광규시집[좀팽이처럼]-문학과지성사
* 달팽이 - 권태응
달 달 달팽이
뿔 넷 달린 달팽이
건드리면 옴추락
가만 두면 내밀고
달 달 달팽이
느림뱅이 달팽이
멀린 한 번 못 가고
밭에서만 놀고 *
* 달팽이 - 김종상
학교 가는 길가에
달팽이 한 마리.
기다란 목을 빼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조그만 집을 업고. *
* 달팽이 - 전래동요
달팽아, 달팽아
너의 집에 불났다.
쇠스랑을 들고서
둘레둘레 해봐라. *
* 달팽이 - 장석주
사는 것 시들해배낭 메고 나섰구나.
노숙은 고달프다!
알고는 못 나서리라,
그
아득한 길들!
* 장석주시집[몽해항로]-민음사, 2010
* 달팽이 - 오순탁
어지러운 먼지 번득이는 속을
두 개의 성냥개비 높이 치켜들고
무얼 그리 찾느냐
귀는 아직 열 때가 아니다 *
* 달팽이 - 박형준
달팽이 한 마리가 집을 뒤집어쓰고 잎 뒤에서 나왔다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 집으로 만든 사나이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
어슴름이 남아 있는 동안 물방울로 맺혀가는
잎 하나의 길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물을 먹을 때마다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을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기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 섞여
저녁 공기가 빠르게 세상을 사라져갈 때
저무는 해에 낮아지는 지붕들이 소용돌이치며
완전히 하늘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거기에 내 모습을 떨어뜨리고 묵묵히 푸르스름한,
비애의 꼬리가 얼굴을 탁탁 치며 어두워지는 걸 바라본다
* 달팽이 -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 간 옛적 누이거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지고
길은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 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 졸음 - 황인숙
달팽이 시내를 건너갑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너갑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너갑니다
달팽이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유리창 위의 달팽이 한 마리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
* 달팽이 뿔 - 김준태
누군가를 받아치기 위해서
머리 꼭대기에 솟아 있는 것은
아니리 나무숲, 우리의 갈 길을
찾기 위해 두리번 두리번거리는
달팽이 뿔, 오 고은 살 안테나!
* 달팽이의 생각 - 김원각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거야 *
* 느린 달팽이의 사랑 - 유하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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