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입춘(立春) 시 모음

효림♡ 2016. 2. 1. 09:00

* 입춘 - 안도현

바깥에 나갔더니 어라, 물소리가 들린다

얼음장 속 버들치들이 꼭 붙잡고 놓지 않았을

물소리의 길이가 점점 길어진다

허리춤이 헐렁해진 계곡도 되도록 길게 다리를 뻗고

참았던 오줌을 누고 싶을 것이다

물소리를 놓아버린 뒤에도 버들치들은 귀가 따갑다

몸이 통통해지는 소리가 몸 속에서 자꾸 들려왔기 때문이다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입춘(立春) - 이해인 

꽃술이 떨리는

매화의 향기 속에

어서 일어나세요, 봄

 

들새들이

아직은 조심스레 지저귀는

나의 정원에도

 

바람 속에

살짝 웃음을 키우는

나의 마음에도

어서 들어오세요, 봄

 

살아 있는 모든 것들

다시 사랑하라 외치며

즐겁게 달려오세요, 봄 *

 

* 입춘 - 장석남

아버지의 사진틀을 갈았다

 

수염을 깎은 듯 미소도 조금 바뀌었다

이발소를 데리고 가던 아버지의 손가락 마디가 두엇 없던 손을 생각한다

언 몸을 금세 녹여주던 이발소의 연탄난로도 생각한다

연통에 쓱쓱 비누거품을 데우던 이발사의 거품붓도 생각한다

전쟁통에 열 번을 살아나와 열한 번을

 

총알 속으로 되몰려갔다던 무심한 대화를 생각한다

아무도 몰래 어금니를 꽉 물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미 이십년이 가까워 얼굴 하관이 마구 빠져나오는 낡은 사진틀을 새로 갈아

식탁 의자에 기대놓고 아버지의 관상을 본다

박복한 이마를, 우뚝한 콧날을,

어투를, 기침 소리를 형제들은 골고루 나누어 받았다

길지 않은 인중만은 아무도 물려받지 않으려 했으리ㅡ허나 그도 알 수는 없다

날은 언제 풀리려나?

강추위다

돌절구에 물이 얼어 쩍하니 금이 갔다

할 수 없이 이번 봄엔 절구에 흙을 담아 꽃을 심으리

아버지가 가꾸던 꽃이 있었던가?

어느 핸가 샘가에 심었던 사철나무만 생각난다

늙도록 꽃도 없이 지루한 나무다

날은 언제 풀리려나

기왓장도 반달도 새파랗게 얼어붙는다 *

*장석남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 입춘 윷판 - 박성우   

처마 끝에 걸린

낡고 오래된 풍경, 소리

쟁그랑쟁그랑 입춘을 알린다  

 

전주 한옥마을

토담길 골목 가운뎃집 마당으로

겨울 털러 온 사람들은

멍석 깔고 장작불 피워

봄이 오는 첫날 아침

입춘대길 윷판을 벌린다  

 

윷은 멍석 위로 던져지고

말은 갈팡질팡 말판을 건넌다

이겨도 별것 없는 판을 놓고

어수선한 실랑이가 벌어지니

밍밍한 구경꾼조차 간섭하여

윷판은 시끌벅적하게 흥성해진다 

 

한말 술에 묵은 김치전이 나와

윷판에서 떼를 쓰던 진안댁이

젤 먼저 술을 따라 부아난 속 달랜다

술주전자를 꿰찬 화산양반은

서너 순배 술을 어깨춤으로 돌린다

몰려온 구경꾼도

윷을 노는 사람도 입춘  

 

윷 한판에 환장을 한다 *

 

* 입춘 - 김선우
아이를 갖고 싶어
새로이 숨쉬는 법을 배워가는
바다풀 같은 어린 생명을 위해
숨을 나누어갖는
둥근 배를 갖고 싶어

내 몸속에 자라는 또 한 생명을 위해
밥과 국물을 나누어먹고
넘치지 않을 만큼 쉬며
말을 나누고
말로 다 못하면 몸으로 나누면서

속살 하얀 자갈들
두런두런 몸 부대끼며 자라는 마을 입구
우물 속 어룽지는 별빛을 모아
치마폭에 감싸안는 태몽의 한낮이면

먼 들판 지천으로 퍼지는
애기똥풀 냄새

 

* 입춘 이후 - 김윤배
언 강 풀립니다
겨울산 완강한 어깨 강물에 기대어 순하고
철새떼 흐린 하늘 잠깁니다.
관목숲 겨우내 갇혀 있던 안개

려나 울울한 모습 드러내는 강안,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얼음 투명한 살 속으로 실핏줄 내렸습니다


새벽 기침 후 차가운 빙질 속 선홍의 섬뜩한 아름다움에 몸 떨었습니다
갇혀 비로소 얻은 자유로움 풀립니다 입춘 이후
언 강 풀려 투명한 빙질에 내린 실핏줄 뜨고
빙질에 갇혀 자유로웠던 날은 강물 따라 흐릅니다


언 강 풀려 흐르는 물길은
당신 거스를 수 없는 또 다른 갇힘입니다

 

* 입춘(立春) - 신석정

가벼운
기침에도
허리가 울리더니

엊그제
마파람엔
능금도 바람이 들겠다.


노곤한 햇볕에
등이 근지러운 곤충처럼
나도
맨발로 토방 아랠
살그머니 내려가고 싶다.

"남풍이 몇m의 속도로 불고
곳에 따라서는 한때 눈 또는 비가 내리겠습니다"

 

* 입춘(立春) 가까운날 - 서정주

솔나무는 오히려 너같이 젊고
스무날쯤 있으면 梅花도 핀다.
千年 묵은 古木나무 늙은 흙우엔
蘭草도 밋밋이 살아 나간다.

 

* 입춘(立春) - 조병화

아직은 얼어 있으리, 한
나뭇가지, 가지에서
살결을 찢으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싹들
아, 이걸 생명이라도 하던가

입춘은 그렇게 내게로 다가오며
까닭 모르는 그리움이
온 몸에서 쑤신다

이걸 어찌하리
어머님, 저에겐 이제 봄이 와도
봄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봄 냄새 나는 눈이 내려도.

 

* 입춘(立春) - 정양 

얼다 녹은 냇물에
살얼음 낀다 살얼음 밟듯
목숨 걸고 봄이 오는지
궁금한 수심(水深)을 길어올리는
피라미 한 마리
하얀 뱃바닥으로 살얼음을 만져보고
갸웃거리며 다시 가라앉는다 *

 

* 입춘 - 박라연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영역까지가
정신이라면
입을 봉하고 싶어도
몽둥이로 두들겨 패주고 싶어도
불가한 것
정신 속에도 사람의 형상이 있다면
눈곱도 떼어내고
칫솔질도 시켜줘야 할 텐데
땀 흘리는 일밖에 떠오르는 게 없어
겨울 내내 미륵산을 오르다가
무슨 선물처럼 전투기를 두 대나 만났다
온몸이 정신인 허공을 가르는 전투기
소리, 미륵산이 쫙쫙 갈라질 때
내 오래된 욕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 봄을 위하여 - 천상병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회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 입춘단상 - 박형진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마음산책

 

* 立春 - 이곡(李穀)

江海歸無日  京華滯此身

未驚金馬夢  又打土牛春

曆法推三統  人情見五辛

不曾爭歲月  何事鬂毛新

-

강해에는 돌아갈 기약도 없이
경사에서 죽치고 있는 이 몸 

금마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토우가 밭 가는 봄을 다시 맞았네
삼통으로 추산하는 역법이라면
오신에서 확인하는 인정이로세 
나는 세월을 다툰 적이 없건마는 
무슨 일로 흰머리가 새로 났는지 *
 

 

* 立春 - 杜甫
春日春盤細生菜 - 춘일춘반세생채  忽憶兩京梅發時 - 홀억양경매발시

盤出高門行白玉 - 반출고문행백옥  菜傳纖手送靑絲 - 채전섬수송청사
巫峽寒江那對眼 - 무협한강나대안  杜陵遠客不勝悲 - 두릉원객불승비
此身未知歸定處 - 차신미지귀정처  呼兒覓紙一題詩 - 호아멱지일제시  

* 입춘
봄이라 소반의 가는 그 생채 매화 피는 두 서울 생각이 나네

고문전을 나오는 소반은 백옥 섬섬옥수 건네 주는 푸른 실 같던 그것
무협의 추운 강변 어찌 눈으로 보랴 먼 두릉 나그네 그저 슬퍼지기만
정착할 곳 모르는 이 몸이기에 아이 불러 종이 찾아 시 써 달랜다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구꽃 시 모음  (0) 2016.04.05
달팽이 시 모음  (0) 2016.03.14
만추(晩秋) 시 모음  (0) 2015.11.06
홍시 시 모음  (0) 2015.10.15
김사인 시 모음 2  (0) 2015.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