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살구꽃 시 모음

효림♡ 2016. 4. 5. 09:00

* 살구꽃 - 김용택 

누님은 하루 종일 고개 들지 않았습니다.

큰 집 돌담에 기대선 아름드리 살구나무 살구꽃이 한 잎 두 잎 바람에 날려

푸른 이끼 돋는 돌담 위에 가만가만 내려앉습니다.

신랑을 따라 고샅길은 잠시 두세 두세 환했습니다. 텃논 한쪽 귀퉁이, 끝이 까맣게 탄 마늘들이 솟고

배웅객들이 반질거리는 텃논 논두렁에 모여 서서 흰 두루마기 강바람에 나부끼며 휘적휘적 누님 앞서 가는 

큰 신랑을 바라보았습니다. 푸른 보리밭 너머로 매형 따라 깜박 사라지는 누님. 팔짱을 풀고 사람들이 마을로 흩어졌습니다.

구나무 살구꽃들도 후후후 흩날려 손거울 사라진 누님의 빈방 지붕 위로 집니다. *

 

* 살구꽃 - 장석남

마당에 살구꽃이 피었다

밤에도 흰 돛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제 얼굴로 넘쳐버린 눈빛

더는 알 수 없는 빛도 스며서는

손 닿지 않는 데가 결리듯

담장 바깥까지도 훤하다

 

지난 겨울엔 빈 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튿어진 채 쏟아졌었다

그 하늘을 어쩌지 못하고 지금

이 꽃들을 피워서 제 몸뚱이에 꿰매는가?

꽃은 드문드문 굵은 가지 사이에도 돋았다

 

아무래도 이 꽃들은 지난 겨울 어떤,

하늘만 여러번씩 쳐다보던

살림살이의 사연만 같고 또

그 하늘 아래서는 제일로 낮은 말소리, 발소리 같은 것 들려서 내려온

神과 神의 얼굴만 같고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

 

  (살구가 익을 때,

  시디신 하늘들이

  여러 개의 살구빛으로 영글어올 때 우리는

  늦은 밤에라도 한번씩 불을 켜고 나와서 바라다보자

  그런 어느날은 한 끼니쯤은 굶어라도 보자)

 

그리고 또한, 멀리서 어머니가 오시듯 살구꽃은 피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어머니에, 하늘에 우리를 꿰매 감친 굵은 실밥, 자국들 * 

* 장석남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비  

 

*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려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

 

* 살구나무 발전소 - 안도현

살구꽃......

살구꽃......

 

그 많고 환한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닐 거야

 

너를 만나러 가는 밤에도 가지마다

알전구를 수천, 수만 개 매어다는 걸 봐

 

생각나지, 하루종일 벌떼들이 윙윙거리던 거,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도

전깃줄은 그렇게 울었지

 

그래,

살구나무 어디인가에는 틀림없이

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

 

낮에도 살구꽃......

밤에도 살구꽃...... *

 

* 살구꽃 편지 - 이병초
미아리 반창코 보아라
시방 거그도 징허게 별일 없지야
스미끼리 성, 옥도정끼 성, 불광동에 풍선 성님도
잘 계시것지야 나는 물론허고 잘 있다
떼돈 벌어서 금의환향허고 싶었는디
고것이 홧병이 되어 가꼬 귀울림병 얻은 것 빼고넌
다 태평성대 무고허다  
디졌다 살아난 것은 예수허고 바둑알뿐이라고
디진 끗발 엔간히 조지라고 화투짝을 휙휙 천정에 꽂아붐서
쌀 이천 짝은 너끈할 판돈 싸들고 돌아서붐서
쐬주병 주둥이를 이빨로 깨물어 훅! 뱉어분 그 시절이
쪼깨 그립기는 허다
두 시간 만에 일억 날려불고도 잠이 오던 그 시절
공장도 공사판도 군대도 교도소도
저승 명부에조차 내 이름이 빠졌다던 그 환한 시절
반창코 너도 기억 허쟈?
끗발 안서불먼 마장동 도살장에 들이닥쳐
암소고 도야지고 잽히는 대로 칵 멱을 따불먼
대번에 콸콸콸 쏟아지던 피   
눙깔 하얗게 뒤집어 까고 쿨룩쿨룩 자껏이
밭은기침을 혀댈 때마다 쿨룩쿨룩 징허게 피를 쏟았제
벌다방 송이다방 문짝덜, 뚜대겨도 뚜대겨도
달광 안 뜨던 개패 쥔 문짝덜 개창 씹창을 냈었제
그러나 인자 착허게 살라고 노력헌다
쌀 둬 말이먼 한 달 조지는디 먼 걱정이
꼽사등이것냐, 워떤 하늘님이
시방까장 살아온 만큼을 또 살으라고 명부 들먹거리먼
금방 디지드라도 내 밥끄럭 엎어불 것인디
목숨의 똥창까장 토해불 것인디
먼 걱정이 구구절절 지붕을 이것냐
글고 반창코 너 말여
인자 내 발보고 자라발이다고 숭보지 마라잉
발가락덜이 엄지를 축으로 엇비슷헌 디다가 뭉툭헌 것은
내 뜻이 아녀, 참말로 인자
이 시상에 아조 없는 것맹이로 납작 엎디어서 살랑게
농사라야 머 멫 마지기 되것냐만 참회허는 맴으로 
돈만 보먼 환장된장허는 음전헌 것덜이
을매나 떵떵거림서 워디까장 개지랄 떠는지
워디서 폭삭 망허는지 똑똑히 지켜봄서
참회허는 맴으로 꼬깽이짐 질랑게

오널은 살구꽃이 폴폴 날링게 호맹이로 디엄자리 뒤적거려 몸띵이 빨간 그시랑들 깡통에 담을란다 이른 새옹개 나올지도 모릉게 얼금얼금헌 모기장베도 챙겨야 쓰것다 씨알이 예전만 못허드라만 그려도 틀못 아니냐? 괴기 안 잽히드라도 채비 애껴서 사먹었던 남부배차장 말좆빵을 추억험서 칸 반 낚싯대를 땡기마 폐 한쪽 띠어내붕게 벌쌔 숨이 차다만 후제 기별헐 때까장 성님덜 잘 모시고 건강혀야 쓴다 버드랑죽 꺼먹고무신 씀

 

*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열매를 맺고 - 문태준 

외떨어져 살아도 좋을 일
마루에 앉아 신록이 막 비 듣는 것 보네
신록에 빗방울이 비치네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살구꽃은어느새 푸른 살구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깎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 놓은 것과 같은 손톱을 깎네
감물 들 듯 번져온 것을 보아도 좋을 일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살구꽃은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혀 끝에서
뭉긋이 느껴지는 슬프도록 이상한 이 맛을 *
 

* 문태준시집[맨발]-창비

 

 

* 봄날은 간다 - 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

* 안도현시집[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 살구꽃 그림자 - 정우영 
나는 마흔아홉 해 전 우리 집
우물곁에서 베어진 살구나무이다.
내가 막 세상에 나왔을 때 내 몸에서는
살구향이 짙게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오랫동안 등허리엔 살구꽃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목울대엔 살구씨가 매달려 있었다.
차츰차츰 살구꽃 그림자는 엷어졌으나
서러운 날 꿈자리에서는 늘 우물곁으로 돌아가
심지 굳은 살구나무로 서 있곤 한다.
그럴 때마다 전설과도 같은 기쁨과 슬픔들이
노란 전구처럼 오글조글 새겨진다.
가끔 눈 밝은 이들이 조용히 다가와 내 어깨에
제 목 언저릴 가만히 얹어놓는다.
그러면 살구나무가 기록한 경전이 내 눈에서
새록새록 돋아나와 새콤하게 퍼지는 우주의 기밀,
슬그머니 펼쳐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별 총총한 그믐날 밤 나는,
가만히 눈 기울여 천지를 살피다가
다시 몸 부려 살구나무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 이전의 역사이다. *
 

* 정우영시집[살구꽃 그림자]-실천문학사 

 

* 황복 - 송수권

살구꽃 몇 그루가 피어

온 마을이 다 환하다.

이런 날은 황사바람 타고

자꾸만 장독대에 날리는 살구꽃잎....

갈대 움트는 것 보러

앞 강변에 나간 마을 사람들

혈기 방장한 나이로 복쟁이 건져다

날 회(膾) 먹고

떼 초상난 적 있었지.

지금쯤 금강 하류

서시유방(西施乳房)처럼 매끈한 배때아리 뒤집으며

구국 황복 떼 오를까.

황산옥(黃山屋)에 들러 자는 듯 먹어봤음. *

 

* 관계 - 안도현

화들화들 꽃 피기 시작하는 저 살구나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요

 

나 혼자서 그냥 살구나무 아래 서 있었는데

살구꽃들이 낭비하는 조명탄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일이 황송해서
꽃 참 곱다, 단 한 번 중얼거렸을 뿐인데

 

이를테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 나 뜨거워진
연애 같은 거, 그게 아니라면
눈을 채 감지도 않고 치르는 촉촉한 和姦 같은 거,
잠깐 생각하고 있었을 따름인데

 

말못할 사건이 그렇게 터진 건가요
바람도 겨드랑이에 손을 갖다댄 일이 없는데
살구나무는 자꾸 킥킥거려요
나도 또 따라서 자꾸 킥킥거려요

 

퍼뜩퍼뜩 말 좀 해봐요
어째 그만 일없이 들통이 났다는 건가요 *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지 시 모음  (0) 2016.07.06
경주 남산 시 모음  (0) 2016.05.25
달팽이 시 모음  (0) 2016.03.14
입춘(立春) 시 모음  (0) 2016.02.01
만추(晩秋) 시 모음  (0) 201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