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지 - 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
* 편지 - 노향림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망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
* 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 김남조시집[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 가을 편지 - 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셔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셔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
* 가을 편지 -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 밤에 쓰는 편지 - 나호열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동이 트기 전에 편지는 끝나야 한다
신데렐라가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처럼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밤에 쓰는 편지는 알코올 성분으로 가득 차고
휘발성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깨어나 창문을 열 때
새벽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푸르러야 한다
맑은 또 하나의 창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어둠을 갈아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적막한 그대를 호명하기 위하여
여름은 부산우체국 신호등 앞에 서있다
바다로 가는 푸른 신호를 기다리며
중앙동 플라타너스 잎새 위에 여름편지를 쓴다
지난여름은 찬란하였다
추억은 소금에 절여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먼 바다 더 먼 섬들이 푸른 잎맥을 타고 떠오른다
그리운 바다는 오늘도 만조이리라
그리운 사람들은 만조바다에 섬을 띄우고
밤이 오면 별빛 더욱 푸르리라
여름은 부산우체국 신호등을 건너 바다로 가고 있다
나는 바다로 돌아가 사유하리라
주머니 속에 넣어둔 섬들을 풀어주며
그리운 그대에게 파도소리를 담아 편지를 쓰리라
이름 부르면 더욱 빛나는 7월의 바다가
그대 손금 위에 떠오를 때까지
* 나뭇잎 편지 - 복효근
누가 보낸 엽서인가
떨어져 내 앞에 놓인 나뭇잎,
어느 하늘 먼 나라의 소식
누구라도 읽으라고 봉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펼쳐놓은 한 뼘 면적 위에
얼마나 깊은 사연이기에
그 변두리를 가늠할 수 없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렇게
발음할 수 없다는 듯,가장 깊은 사랑은
다만 침묵으로만 들려줄 수 있다는 듯
글자는 하나도 없어
보낸 이의 숨결처럼 실핏줄만 새겨져 있어
아무렇게나 읽을 수는 없겠다
누구의 경전인가
종이 한 장의 두께 속에서도
떫은 시간들은 발효되고 죄의 살들이 육탈하여
소멸조차 이렇게 향기로운가
소인 대신 신의 지문이 가득 찍힌 이 엽서는
보내온 그이를 찾아가는 지도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도 이 모습으로 가야하겠다
* 복사꽃 편지 - 김종제
지난 생에
꽃으로 맺은 약속을
잊지 아니하여 왔더니
소낙비에
사나운 바람에
복사꽃 짧아서
붉은 꽃잎 편지는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네
조각난 저 편지
한 잎, 당신의 입술을 읽네
한 잎, 당신의 눈을 읽네
한 잎, 당신의 가슴을 읽네
한 잎 저 글속에
내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더니
복사꽃 편지의 나를
당신이 읽고 있네
한 잎, 거친 손을 읽네
한 잎, 뜨거운 혀를 읽네
한 잎, 숨 가쁜 나의 뼈를 읽네.
* 어떤 편지 - 도종환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 편지 - 김용택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말과
당신의 글이
다
내 마음과
내 말과
나의 글입니다.
* 편지 1 - 이성복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
* 편지 - 채호기
당신이 보낸 편지의 글자들 같네
강물의 흐름에도 휩쓸려가지 않고
편안히 가라앉은 조약돌들
소근소근 속삭이듯 가지런한 평온함
그러나 그중 몇 개의 조약돌은
물 밖으로 솟아올라 흐름을 거스르네
세찬 리듬을 끊으며 내뱉는 글자 몇 개
그토록 자제하려 애써도
어느새 평온함을 딛고 빠져나와
세찬 물살을 가르는 저 돌들이
당신 가슴에 억지로 가라앉혀둔 말이었겠죠
당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심장 속에 두근거리는 *
* 나 대신 꽃잎이 쓴 이 편지를 - 홍우계
부칠데는 없지만 써야겠다고
오늘도 꽃그늘에 나왔습니다마는
한낮이 기울도록 한자도 못쓰는데
심술처럼
얼굴가린 바람이 와 꽃가지를 흔들자
내 볼을 간질이며 간간이 진 꽃잎이
내 말 대신 편지지에 자리를 잡을 때
내 옷에 촉촉히 스민 목련향.
내가 쓸 말 대신 향내만 촉촉한
이대로 접고 봉한 이 편지를 받으실
어디먼데 누구라도 계시면 좋겠습니다.
* 남으로 띄우는 편지 - 고두현
봄볕 푸르거니
겨우내 엎드렸던 볏짚
풀어놓고 언 잠 자던 지붕 밑
손 따숩게 들춰보아라.
거기 꽃 소식 벌써 듣는데
아직 설레는 가슴 남았거든
이 바람 끝으로
옷섶 한 켠 열어두는 것
잊지 않으마.
내 살아 잃어버린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너.
*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 김용화
소한날 눈이 옵니다
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
눈이 옵니다
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풍금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창문 조금 열고
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
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겨울나무 가지 끝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가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당신을 만나는 일이
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
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
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댈 것입니다
* 편지 - 이정록
폭풍우가 나만 비껴가겠나?
대나무 흰 뿌리가 다 파헤쳐졌네
우후죽순의 시절 다 지나갔네만
모진 목숨 어쩌겠나? 짦은 마디 비틀어
하늘 쪽으로 춤사윌 펼치고 있네
이파리로 시작해서 이파리로 끝나는
가운데가 뿌리인 생, 말편자 같은
척추 마디를 달려가고 있네만
관통이나 직통은 멀기만 하네
벼랑에 매달려 있기 때문도
마디가 많기 때문도 아니라네
어디로 뻗어나가도 결국
몸 안에다 마디만 늘리는 일,
빈손이 허전하면 톱이라도 들고 옴세
대나무 숯불구이 어떻겠나?
대는 대를 떠나야만 관통이든 파죽이든
끝장을 볼 것 아니겠나? 모진 것끼리
피식피식, 대꽃 한번 피워봄세 *
* 이정록시집[정말]-창비
* 편지 - 이해인
어제를 보내고 돌아와
닫혀진 창을 열면
순백의 옷을 입고 오는
정결한 아침
어머니
때로는 슬픔이 기다리는
좁은 돌층계를 기쁘게 오르다가
갑갑하게 돌아와 부른
나의 노래가 한숨일지라도
진정 오랜 날 하늘을 안고
깊은 마음밭에 물을 뿌리게 한
신앙은 또 하나의
목숨이었습니다
한 번밖엔 주어지지 않은
짧은 여정(旅程)을 위해
얼마나 성스럽게 짐을 꾸려야 할지
그 한 분의 큰 손이
나의 어깨를 치셨습니다
부르시는 소리에 옷깃을 여미며
처음인 듯 새롭게
가득히 안아 보는
은혜로운 햇살
어머니
일출의 바다는 또한
일몰의 바다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님이 오실 그 바다에서
당신을 만나겠지요
짙푸른 파도 같은
노래를 태우며
가야 할 아침들이 기도에 젖어
늘 깨어 있었으면 합니다
어머니 *
* 이해인 수녀의 사모곡[엄마]-샘터
* 편지 - 하인리히 하이네
당신이 보내 준 편지를
나는 마음에 두지 않으렵니다.
당신은 쓰셨어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하지만 그 편지는 너무나 길었지요.
열두 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정성스레 깨끗이 쓴 글씨.
진정 당신이 나에게 싫증이 났다면
이토록 세심하게 쓸 리가 없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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