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경주 남산 시 모음

효림♡ 2016. 5. 25. 09:00

* 길 -경주 남산 - 정일근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이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 길 지도 위에 새겨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산이 사람에게 풀어 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 갈 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 길 따라 내가 가네. *
 

 

* 경주 남산(南山)에 와서 - 유안진  

묻노니, 나머지 인생도
서리 묻은 기러기 죽지에
북녘 바람길이라면

 

차라리
이 호젓한 산자락 어느 보살(普薩) 곁에
때이끼 다숩게 덮은
바위로나 잠들었으면

 

어느 훗날
나같이 세상을 춥게 사는

석공(石工)이 있어
아내까지 팽개치도록
돌에 미친 아사달(阿斯達) 같은
석수(石手)장이 사나이 있어

 

그의 더운 손바닥
내 몸 스치거든
활옷 입은 신라녀(新羅女)로 깨어나고저. *

 

* 경주 남산 - 이하석  

돌 안에 슬픔이, 금 가기 쉬운 상처가

들어앉아 있다

미소를 머금은 채


누가 그걸 깎아 불상으로 드러내놓았을까

제 마음 형상 깎아내놓고

내 슬픔 일깨우려 기도하라는가


나는 없고

이 돌만이 오래 있을 뿐

슬픔 앞에 불려온 이들 기도로

천둥 치면 어둡던 돌의 뒤가 환해진다 *

 

* 경주 남산 - 정호승     

봄날에 맹인 노인들이

경주 남산을 오른다

죽기 전에

감실 부처님을 꼭 한번 보고 죽어야 한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남산에 올라

안으로 안으로 바위를 깎아 만든 감실 안에

말없이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바라본다

땀이 흐른다

허리춤에 찬 면수건을 꺼내 목을 닦는다

산새처럼 오순도순 앉아 있다가

며느리가 싸준 김밥을 나누어 먹는다

감실 부처님은 방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

맹인들도 아무 말이 없다

해가 지기 전

서둘러 내려오는 길에

일행 중 가장 나이 많은 맹인 노인이

그 부처님 참 잘생겼다 하고는

캔사이다를 마실 뿐

다들 말이 없다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1999

 

* 연가 -경주 남산 - 정일근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일 년 삼백 예순 닷새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람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맑은 이슬이 되는, 

* 정일근시집[경주 남산]-문학동네, 1998


* 마애불 - 조두섭

저 하늘 파들거리는 초록 제비는

떨어져 나간 돌부처 귀다

아랫입술이다

세상 밖으로 하나, 하나씩

떨어져 나간

경주 남산 돌부처 이목구비는

덤불찔레꽃 분홍 명암으로 드러난다

어찌 뜨거운 숨결만이 생명인가

나비떼는 돌부처 한쪽 어깨가

부서지고 깨어진 조각, 풍경 소리 여운 같은

전신에 파르스름한 이끼는

돌부처가 우화(羽化)하고

세상에 남긴 흔적

아, 흔적이라니

처음부터 돌부처에게

육신이 필요 없었던 것을 

 

* 부처바위 - 손택수 

경주 남산 스님 한 분 바위 속에 갇혀 있다. 반야나무 망고나무 잎 아래 결가부좌 튼 채 안으로 금이 가고 금길 따라 빗물이 흘러드는 소리를 엿듣고 있다. 죽어서 바위는 모래알을 남기고 고승은 사리알을 남긴다는데..... 천년 비바람에 가사 옷주름이 지워지고 얼굴선이 희미해지면서 둘은 이제 어지간히 닮아도 보인다. 그러나 바위가 사리알이 되기까지, 스님이 모래알이 되기까지 크낙한 저 침묵은 또 천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선정에 든 바위에서 흐르는 눈물, 모래 쓸리는 소리가 아릿하다  

 

* 둥근 길 - 이태수
경주 남산 돌부처는 눈이 없다
귀도 코도 입도 없다


천년 바람에 모든 껍데기 다 내주고

천년을 거슬러 되돌아가고 있다
안 보고 안 듣고 안 맡으려 하거나

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천년의 알맹이 안으로 쟁여 가기 위해

다시 천년의 새길을 보듬어 오기 위해
느릿느릿 돌로 되돌아가고 있다
돌 속의 둥근 길을 가고 있다

 

새 천년을 새롭게 열기 위해

둥글게 돌 속의 길을 가고 있다 *

* 이태수시집[침묵의 푸른 이랑]-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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