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문태준 시 모음 3

효림♡ 2015. 7. 23. 09:00

*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 문태준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

 

* 아침을 기리는 노래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 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 번째, 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

* 봄바람이 불어서 

봄바람이 불어서

잔물결이 웃고

 

봄바람이 불어서

굴에서 뱀 나오고

 

봄바람이 불어서

밑돌이 헐겁고

 

봄바람이 불어서

진 빚을 갚고

새 빚을 내고

 

봄바람이 불어서

귀신이 흐늘거리고

 

봄바람이 불어서

저쪽으로 가는 물빛

세계의 푸른 두 눈 *

 

*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

* 나는 내가 좋다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닐곱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다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물을 실어 만든 촉촉한 못자리처럼

눈물이 괼 줄을 아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 *

 

* 장춘(長春)

참꽃을 얻어와 화병에 넣어두네

 

투명한 화병에 봄빛이 들뜨네

 

봄은 참꽃을 기르고 나는 봄을 늘리네 *

 

* 이 시간에 햇살은

마른 산수국과 축축한 돌이끼에 햇살이 쏟아지네

묏등과 무덤을 두른 산담에 햇살이 쏟아지네

끔적끔적 슬쩍 감았다 뜨는 눈 위에 햇살이 쏟아지네

나의 움직이는 그림자와 걸음 소리에 햇살은 쏟아지네

서럽고 섭섭하고 기다라니 훌쭉한 햇살은 쏟아지네

외할머니의 흰 머리칼에 꽂은 은비녀 같은 햇살은 쏟아지네

이 시간에 이 햇살은 쏟아지네

찬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앉으니 따라와 바깥에 서 있네 *

 

* 여시(如是)

 백화()가 지는 날 마애불을 보고 왔습니다 마애불은 밝은 곳과 어둔 곳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눈두덩과 눈, 콧부리와 볼, 입술과 인중, 목과 턱선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안면의 윤곽이 얇은 미소처럼 넓적하게 펴져 돌 위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객들은 그 마애불에 곡식을 바치고 몇번이고 거듭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깊은 밤에 홀로 누워 있을 때 마애불이 떠올랐습니다 내 이마와 눈두덩과 양 볼과 입가에 떠올랐습니다 내 어느 반석에 마애불이 있는지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온데간데없이 다만 내 위로 무엇인가 희미하게 쓸려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

* 소낙비  

나무그늘과 나무그늘

비탈과 비탈

옥수수밭과 옥수수밭

사이를

뛰는 비

너럭바위와 흐르는 시내

두 갈래의 갈림길

그 사이

하얀 얼굴 위에

뿌리는 비

열꽃처럼 돋아오는 비

이쪽

저편에

아픈 혼의 흙냄새

아픈 혼의 풀냄새

 

소낙비 젖어 후줄근한 고양이 어슬렁대며 산에 가네

이불 들고 다니는 행려처럼 여름낮은 가네 *

 

* 가을비 -드로잉 6

나를 떠나려네

 

야위어서

흰 뼈처럼

야위어서

 

이젠 됐어요

이젠 됐어요

 

보잘것없는

툭툭 내던지는

비 *

 

* 대치(對置) -드로잉 8

  날고 있는 잠자리와 그 잠자리의 그림자 사이 대기가 움직인다 이리저리로 날고 있는 잠자리와 막 굴러온 돌을, 앉은 풀밭을, 갈림길을, 굼틀굼틀하는 벌레를 이리저리로 울퉁불퉁 넘어가고 있는 그 잠자리의 그림자 사이 대기가 따라 움직인다 대기는 둘 사이에 끼여 있지만 백중한 둘을 갈라놓지는 않는다 *

* 일원 -바라나시에서

  누운 소와 깡마른 개와 구걸하는 아이와 부서진 집과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돼지와 낡은 헝겊 같은 그늘과 릭샤와 운구 행렬과 타는 장작불과 탁한 강물과 머리 감는 여인과 과일 노점상과 뱀과 오물과 신()과 더불어 나도 구름 많은 세계의 일원() *

 

* 문태준시집[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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