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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도둑 - 이상국

효림♡ 2015. 9. 24. 09:00

* 달려라 도둑 - 이상국

도둑이 뛰어내렸다. 

추석 전날 밤 앞집을 털려다가 퉁기자 
높다란 담벼락에서 우리 차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집집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이웃들은 골목에 모였다. 
 
- 글쎄 서울 작은 집, 강릉 큰애네랑 거실에서 술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데 거길 어디라고 들어오냔 말야. 
앞집 아저씨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다. 
- 그러게, 그리고 요즘 현금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딨어. 다 카드 쓰지.
거 돌대가리 아냐?

라고 거드는 피아노 교습소집 주인 말끝에 명절내가 난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 이랬다. 
- 여북 딱했으면 그랬을라고......


이웃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밤이슬 내린 차 지붕에 화석처럼 찍혀 있는 도둑의 족적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허름한 츄리닝 바람에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서 뛰어내린 한 사내가 열나흘 달빛 아래 골목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는 걸 언뜻 본 것 같았다.

 

* 이상국시집[뿔으리 적시며]-창비

 

* 도둑과 시인 - 이상국


 

어느 해 추석 앞집에 든 도둑이

내 차 지붕으로 뛰어내리던 밤, 

감식반이 와서 족적을 뜨고

나는 파출소에 나가 피해자 심문을 받았다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그리고

하는 일 등을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 일이 있고 나는 「달려라 도둑」 이라는 시를 썼다

들키는 바람에 훔친 것도 없으니까

잡히지 말고 추석 달빛 속으로

그림자처럼 달아나라는 시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경찰서에서 그 사건을 불기소처분한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나라 경찰은 몰라보게 편리하고 친절했다

그러나 도둑의 무게만큼 찌그러진 차

지붕을 새로 얹는 데 만만찮은 수리비에 대하여서는

앞집은 물론 경찰도 전혀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 시로 원고료를 소소하게 받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미 발표한 시를 물릴 수는 없고

그래서 나는 그 도둑이라도

이 시를 읽어주었으면 하는데......

 

* 이상국시집[달은 아직 그 달이다]-창비,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