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 허만하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 새 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 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서린 긴장을 견디지 못한 야생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 오리들은 일제히 물을 차는 자욱한 깃 소리가 되어 눈부신
하늘에 퍼진다. *
* 허만하시집[야생의 꽃]-솔, 2006
* 물결에 대해서 - 허만하
1
총을 맞고 왈칵 거꾸러지는 돌격대 병사의 마지막 몸짓을 생각나게 하지만
물결은 한여름 밤하늘을 흘러내리는 불꽃같이 몸의 중심부에서 터지는 것이다.
육체의 균형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외줄 위에 서 있는 곡예사가 하늘 높이에서
노려보는 한계를 물결은 시시각각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까마귀가 날고 있는
더운 밀밭을 짓누르고 있는 검푸른 하늘이 오히려 고요한 것은 벌써 아슬아슬
한 파국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터질 것 같
은 고요를 안으로 견디고 있는 물결.
2
무너지기 위하여 물결은 몸을 안으로 말아올리며 힘껏 솟아오르나 붕괴 직전
잠시 숨을 죽이는 순간을 가진다. 높이뛰기 선수가 뛰어오른 하늘에서 잠시 머
무는 것과 같다. 고갯길 정상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풍경을 전망하는 나그네 눈
길을 스치는 햇빛 한 올같이 짧은 한순간의 망설임. 살을 안으로 말아올리는
연속 동작은 수면에 떠오르는 가오리 가슴지느러미 너울거림같이 부드럽다. 결
정에 이른 물결에 임의의 점을 설정하고 그 점을 이으면 물은 빠져나가고 아름
답게 휘어진 곡선만이 뒤에 남는다.
3
유적을 부는 바람처럼 물결은 몸짓으로만 있다. 아테네의 유적 같으나 붕괴
의 속도에는 차이가 있다. 물결은 풍화하지 않는다. 목숨의 흔적이 없는 지구
에 처음으로 연두색 바다가 태어나던 눈부신 순간부터 태어남과 사라짐을 되풀
이하고 있는 물결. 처음 만나는 군청색 지중해 해안에서 어디서 한 번 본 얼굴
같은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길에서 잃어버린 자기 얼굴을 물결의 몸짓에 비추
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재생과 죽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목숨의 쓸
쓸함.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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