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월하정인(月下情人) - 오태환

효림♡ 2017. 8. 5. 09:00

* 월하정인(月下情人) - 오태환
녹청 기와담장 넘은 그믐달빛에
담천(曇天) 같은 시래기 시래깃국 그믐달빛에
싸잡아서 한 냥 서 푼어치에
마음을 들켜
파들짝 불잉걸 데듯 하는 사연을 아시나요
아흐레 낮녘 지당(池塘)에 낀 떼수련(睡蓮)서껀
거문고처럼 기댄 조릿대서껀 청매(靑梅) 송아리서껀
그냥 국으로 고개를 튼 생강꽃서껀
울컥울컥 봄꽃 찌클어진 그 자리
쟁강쟁강 꽃그늘
속손톱만큼씩 한 그늘만 닿아도
한사코 비장(脾臟) 속까지 데듯 하는 사연을 아시나요
여울 기슭 비오리새끼처럼 모가질 감고 부벼도
삽짝 건넌 눈맞춤 같은 슬픔뿐인데요
입 안 가득 은비녀 무는 슬픔뿐인데요
물 같은 가슴가슴 물이랑 일듯 소름이 돋쳐
하냥 사늘히 엎지르기나 할 따름인데요
반물모시 쓰개치마
겹으로 동이고 여민 열 예닐곱 사연일란
백마금편(白馬金鞭)은 고사하고
물색없는 불목하니처럼 훔쳐가세요
아예 보리누름께 명화적패처럼 앗아가세요 *

 

* 숨 쉬는 항아리 - 박이도
안개밭 은하수에
조각달 스치듯
천지연 미리내에
먹물을 뿌린 듯
오롯한 품
이제, 천 년 전설이 된 정물(靜物)

비바람의 숨결
흙과 불의 조화 속에
태어난 영물(靈物)
너는 뉘 영혼을 살고 있나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나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뿜어나는 매화향기
맑은 대바람소리에
나는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 *

 

* 성덕대왕신종 - 유안진
너무 깊고 너무 아픈 사연을 모아
부처님께 빌었어라
한번 치면 서라벌이 평안했고
두 번 치면 천리까지 평안했고
세 번 타종하면 삼천리까지라
거기까지가 신라(新羅) 땅 되었어라
금수강산으로 수(繡) 놓였어라
어지신 임금님의 옥음(玉音)이 되었어라
만백성들 어버이로 섬기었어라
끝없이 태어날 아기들을 위하여
끝없이 낳아 키울 어미들을 위하여
한 어미가 제 아기를 공양 바쳐 빌었어라
껴안고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빌었어라

에밀레∼ 에밀레레∼ 종(鐘)소리 울렸어라. *

 

* 오손도손 귓속말로 - 임진수 
나무 위의 새들이 보았습니다.
해질 무렵 공원은 어스름한데
할머니와 또한 그렇게 늙은 아저씨가 앉아 있었습니다.

나무 위의 새들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황혼
집은 없어도
흐르는 세월에
다정을 싣고
오손도손 그렇게 살아가자고
귓속말로 사랑한다 했습니다.

나무 위의 새들이 물었습니다.
사랑이란 그 무엇인가
그리고 또 인간이란. *

 

* 미래에서 온 시 - 정일근 
저건 거대한 바위가 아냐 
저건 바위에 새겨진 그림들이 아냐 
하늘과 땅과 바다의 비밀을 
사람의 내일을 노래한 
저건 미래에서 온 시(詩) 
바위그림을 보러온 사람은 읽지 못하는 
저 시의 제작연도에 대해 
수천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미래의 언어로 쓰인 
21세기가 읽지 못하는 저 시를 
물소리는 물의 언어로 읽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가는데 
시인조차 시를 알지 못해 고래는 고래 
호랑이는 호랑이 사람은 사람 
바위 속에 새겨진 시를 
자꾸 그림으로만 헤아리다 온다 *

 

* 청자모자원형연적 - 신중신
마음 함께 비취빛이었을
고려적 웬 사내
햇볕 좋은 봄날
전대미문의 연적 하나를 구워냈다네.
그의 심성 익살궂었던지
사철 양반네 머리맡에 놓일 그것
그 시늉만으로도 헤살질이 진득 묻어나는
앙증맞은 잔나비상을,
사내 심사 또한 따스하여
그것도 새끼 보듬은 원숭이 모양을,
애오라지 천연스럽고 정감 하나인
저 청자모자원형연적을 구워냈다네.
─저것 보아, 저것 좀 보아!
어미 정수리로 부어넣은 물이
새끼 뒤통수께로 흘러나와
먹물을 간다 미소가 번진다
삼짇날 저물녘, 비색(翡色) 이내 같은 것이 설핏한가 싶더니
남녘마을 선비 마음을 적셔
인연 굽이굽이 강물 짓느니. *

 

* 지상에 없는 잠 - 최문자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젯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

 

*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 - 오탁번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마(天馬)의 가쁜 숨결은  
서라벌 뙤약볕 들녘을  
다 지우고도 남아  
치켜든 꼬리와 날리는 갈기가  
오히려 가붓하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흰 몸이  
하늘과 땅  
아스라한 거리만큼 눈부시고  
인동(忍冬)덩굴무늬 구름바다 사이로  
왕국의 아침 찬란하게 밝아온다  
장니(障泥)가 흔들릴 때마다  
희고 붉은 흙빛 채색이  
이냥 새뜻하여  
신라 천년의 옛 사직은  
또렷또렷 현재진행형이다  
천마의 울음소리에  
천오백년 깊은 잠을 자던  
왕과 백성들이  
천마표 타임머신 타고  
광속(光速)으로 달려온다  *

 

*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

 

* 금동반가사유상 - 김종길
왼쪽 무릎 위에 발목을 얹은
수평으로 접은 오른쪽 다리,
왼손은 그 발목을 감싸고 있다.

허벅지에 고인 팔꿈치 위에 피어난
연꽃인가.
볼에 닿을 듯 말 듯 살짝 꼬부린
오른손 세 손가락

천 몇백 년 동안,
그 자태 그대로 흐트림 없이
무엇을 그리도 골똘히 생각하는가.

인간의 업고여, 생로병사여,
그러나 그것들로부터는 아득히 벗어난
오히려 앳되고 예쁜 젊은 그 얼굴! *

 

* 묵매(墨梅) - 강영은 
휘종의 화가들은 시(詩)를 즐겨 그렸다

산 속에 숨은 절을 읊기 위하여 산 아래 물 긷는 중을 그려 절을 그리지 않았고 꽃밭을 달리는 말을 그릴 때에는 말발굽에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 몸속에 절을 세우고 나비 속에 꽃을 숨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었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늙은 수간(樹幹)과 마들가리는 안개비로 비백(飛白)질하고 골 깊이 번지는 먹물 찍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만 그렸다 처음 붓질했던 마음에 짙은 암벽을 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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