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세월 시 모음

효림♡ 2017. 9. 1. 09:00

*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 더는 갈 수 없는 세월 - 조병화
걸어서 더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더는 날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 다가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세월 - 함민복

문에 창호지를 발라보았지요

창호지를 겹쳐 바르며

코스모스 꽃무늬도 넣었지요

서툰 솜씨에

울어, 주름질 것 같던 창호지

햇살에 말리면

팽팽하게 펴졌지요

손바닥으로 두들겨보면

탱 탱 탱 덩 덩 덩

맑은 북소리 났지요

 

죽고 싶도록 속상하던 마음도

세월이 지나면

마음결 평평하게 펴져

미소 한 자락으로

떠오르기도 하지요 *

 

* 세월이 갔습니다 - 김용택
저기 저 꽃 피는 것 보니

당신이 오시는 줄 알겠습니다


저기 저 꽃 지는 것 보니

당신이 가시는 줄 알겠습니다


한 세월

꽃을 보며 즐거웠던 날들

당신이 가고 오지 않아도
이제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줄을 알겠습니다

* 김용택시집[연애시집]-마음산책, 2002

 

*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은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 봄비 속에 세월은 - 이병주
토닥토닥 내린 봄비에
마음 적셔보며
같이 했던 지난날을 그리려 한다.

언제까지 사랑하겠다고
철부지처럼 매달려 보채던 날들은
활동사진 만들어
마음에 각색해놓고서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의 사랑은
운명의 장난이던가.
세월은 조금씩 허물어 버리고
내리는 봄비로 그리움만 적시려 한다. 

* 강 같은 세월 - 김용택

꽃이 핍니다
꽃이 집니다
꽃 피고 지는 곳
강물입니다
강 같은 내 세월이었지요
 *

 

* 세월 - 이준규   

가슴에 병이 나서 커튼과 재와 구름이 날리고

하늘을 물들이는 잠자리 떼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몰락의 기운

나는 하루 종일 병든 소파에 누워 있다

매미의 계절은 가고

알 수 없는 질투

나의 정면과 나의 배면에서 일제히 바람이 분다

그럼 매미는 울었고 나는 슬펐다

보다 더 진지해지자

단어들이 장악한 낭만

표면만 있는 심연

그러고도 웃을 수 있을까

양버즘나무가 누추한 옷을 벗고 다시 입고

눈은 쌓이고 비는 지나가고

구름 사이로 숨은 비참한 태양은 붉은

강물의 자맥질을 시인하고

서러운 똥물 답답한 죽음

언덕 위에서 우리는 키스 없이 헤어졌다

각자의 없는 삶을 향해 걸었지

전철역의 입구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각자 빗속에서 처참했다

해가 지다

해가 뜨다

아 저 개 좋다

나보다 비싸겠다 *  

* 이준규시집[흑백]-문학과지성사 

 

* 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 - 신현림 

멸종된 인간은 그리움이지만

멸종된 시간은 두통이다

 

사라진 어제를 향해

"그래, 네 맘대로 가라"

문을 열었다 닫는 순간
팔십년대의 그림자가 피걸레처럼 뒹굴고
투사의 외로운 운동화가 쓰러진 곳에
우르르 삐삐와 쇼핑백을 든 이들이 몰려갔다
가는 곳마다 종말의 쇠사슬인 차가 밀렸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흩어졌다
어떤 친구는 따분하다며 무덤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밥 한끼 먹었을 뿐인데 백년이 지났단다
기계의 나사가 빠지면 재빨리 갈아끼우듯

세대교체는 간편했다
세월은 구름처럼 단조롭고 졸립지요
영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보니
노을만큼 눈이 화악 떠집디다
비디오는 이 시대의 마약입니까?
저승 가는 길에도 비디오방에 들르시오
잠옷처럼 편한 바람이 불면

그날만큼은 TV를 끄고 시를 읽어주세요


제 청춘의 바통을 받으시고

흐지부지 끝나는 인연만큼이나 슬프지만
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
그만 커튼을 내리시고 전기불은 꺼주세요
불빛이 꺼지면 나나 당신들

아예 지구에서 사라지면 어떡하죠
빨간 잉어가 왕겨 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세월, 갈 테면 어서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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