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사랑 시 모음 2

효림♡ 2017. 9. 29. 09:00

* 사랑 그 눈사태 - 윤제림

침 한번 삼키는 소리가
그리 클 줄이야 !

설산(雪山) 무너진다, 도망쳐야겠다. *

 

* 사랑 - 문무학
‘사람’과 ‘사랑’은 글자 서로 닮아

사람이 사랑하는 법 넌지시 일러준다

‘사람’의 모난 받침을

어루만져 ‘사랑’이라고

 

* 사랑법 - 문효치

말로는 하지 말고
잘 익은 감처럼
온몸으로 물들어 드러내 보이는

진한 감동으로
가슴속에 들어와 궁전을 짓고
그렇게 들어와 계시면 되는 듯

 

* 사랑 - 김상미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 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

 

* 사랑 - 박노해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여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


* 사랑에게 - 김석규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류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

 

* 사랑하고 싶은 날 - 오탁번  

앵두나무 꽃그늘에서
벌떼들이 닝닝 날면
앵두가 다람다람 열리고
앞산의 다래나무가
호랑나비 날갯짓에 꽃술을 털면
아기 다래가 앙글앙글 웃는다

태초 후
45억 년쯤 지난 어느 날
다랑논에서 올벼가 익어갈 때
청개구리의 젖은 눈알과
알밴 메뚜기의 볼때기에
저녁노을 간지럽다

된장독에 쉬 슬어놓고
앞다리 싹싹 비벼대는 파리도
거미줄 쳐놓고
한나절 그냥 기다리는
굴뚝빛 왕거미도
다 사랑하고 싶은 날 *

 

* 사랑의 길 - 윤후명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갈 길은 늘 아득하다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사랑이다 *

* 윤후명시집[쇠물닭의 책]-서정시학 

 

*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 김태동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굵은 글씨로 써내려가리라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갈지라도

나 그 빗물 되어 사랑했었다고 소리치리라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오랜 침묵 뒤 저 금빛 저무는 산 한 그루 나무가 되리니

누구보다 먼저 아름다운 시절 사랑했었다고 목이 메는 갈매기도 세월은 늘

물결 부서지는 암초더미에 걸려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푸르게 푸르게 울고 있듯이

슬픔이 다하는 날 나 돌아보지 않으며

나,

이 아름다운 시절 사랑하며 이곳을 떠난다고 길모퉁이

지워지는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이여

연인이여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간다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

 

* 사랑 - 이성선 
더러운 내 발을 당신은
꽃잎 받듯 받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흙자국을 남기지만
당신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당신을 눈물과 번뇌로 지나가고
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건넙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당신은 자꾸 늙어만 갑니다.

 

* 여울 - 문태준 
축축한 돌멩이를 만나 에돌아 에돌아 나가는,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어라
문둑 멈추어 돌이끼로 핀, 물이 그리워하는 소리를 들어라
사랑하는 이여, 처음도 끝도 없는 이 여울이 나는 좋아라
혀가 굳고 말이 엇갈리는 지독한 사랑이 좋아라
손아귀에 움켜쥐면 소리조차 없는, 메마른 물의 얼굴이어도 좋아라

 

* 수묵의 사랑 - 손택수  

수묵은 번진다

너와 나를 이으며,

누군들 수묵의 생을 살고 싶지 않을까만

번짐에는 망설임이 있다

주저함이 있다

네가 곧 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

경계를 넘어가면서도 수묵은

숫저운 성격, 물과 몸을 섞던

첫마음 그대로 저를 풀어헤치긴 하였으나

이대로 굳어질 순 없지

설렘을 잃어버릴 순 없지

부끄러움을 잃지 않고 희부연히 가릴 줄 아는,

그로부터 아득함이 생겼다면 어떨까

아주 와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빛깔,

한 몸이 되어서도 까마득

먹향을 품은 그대로 술렁이고 있는

수묵은 번진다 더듬

더듬 몇백 년째 네게로

가고 있는 중이다 * 

* 손택수시집[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 2014

 

* 나에게 사랑이란 - 정일근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마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 여름비 - 정일근
은현리 대숲이 비에 젖는다
책상 위에 놓아둔 잉크병에
녹색 잉크가 그득해진다
죽죽 죽죽죽 여름비는 내리고
비에 젖는 대나무들
몸의 마디가 다 보인다
사랑은 건너가는 것이다
나도 건너가지 못해
내 몸에 남은 마디가 있다
젖는 모든 것들
제 몸의 상처 감추지 못하는 날
만년필에 녹색 잉크를 채워 넣는다
오랫동안 보내지 못한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사람
푸른 첫줄 뜨겁게 적어놓고
내 마음 오래 피에 젖는다 *

* 정일근시집[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사상사

 

* 이런 사랑 - 버지니아 울프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나
세상에 하나뿐인 어머니도
가끔은 멀리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당신은 한 번도 싫은 적이 없어요

어떤 옷에나 잘 어울리는 벨트나
예쁜 색깔의 매니큐어도
몇 번 쓰고 나면 싫증이 나지만
당신에 대한 마음은
아직 한 번도 변한 적 없어요

새로 산 드레스도
새로 나온 초콜릿도
며칠만 지나면 싫증이 나는데
당신은 아직 한 번도
싫증난 적 없어요
숙성된 포도주나 그레이프 디저트도
매일 먹으면 지겨워지는데
당신은 매일매일 같이 있고 싶어요

 

* 사랑 - 이상국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가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

* 오래된 사랑 - 이상국 

백담사 농암장실 뒤뜰에

팥배나무꽃 피었습니다

길 가다가 돌부리를 걷어찬 듯

화안하게 피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몇백년이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햇살이 부처님 아랫도리까지 못살게 구는 절 마당에서

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

지나가는 바람에도

제 속을 다 내보일 때마다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었습니다

그 오래된 사랑을

절 기둥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바라봐주었습니다 * 

이상국 시집[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창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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