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지리산 시 모음 2

효림♡ 2017. 10. 10. 09:00

* 바람의 편지 -지리산 - 최승자 

내 너 두고 온 지

벌써 한 달

바람의 편지도

이젠 그쳤구나

 

아 내 기억 속에서

푸르른 푸르른

 

또 다시 하루 가고 이틀 가도

내 기억 속에서

푸르른 푸르른

 

언제나 새로이 쓰여질

아 지리산, 바람의 편지 *

 

* 가을 -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

* 정호승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 지리산 - 이은상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은 언제 오를고

청학동(靑鶴洞) 접어들어 길을 헤맬제

칠불암(七佛庵) 목탁소리 다정도 하라

산다(山茶)에 목축이라고 부르는구나

-운상원(雲上院)중에서

 

* 지리산 - 이시영
나는 아직 그 더벅머리 이름을 모른다
밤이 깊으면 여우처럼 몰래
누나 방으로 숨어들던 산사내
봉창으로 다가와 노루발과 다래를 건네주며
씽긋 웃던 큰 발 만질라치면
어느새 뒷담을 타고 사라지던 사내
벙뎀이 감시초에서 총알이 날고
뒷산에 수색대의 관솔불이 일렁여도
검은 손은 어김없이 찾아와 칡뿌리를 내밀었다
기슭을 타고 온 놀란 짐승을 안고
끓는 밤 숨죽이던 누나가
보따리를 싸 산으로 도망간 건 그날밤
노린내 나는 피를 흘리며 사내는
대창에 찔려 뒷담에 걸려 있었다
지서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대밭에 숨고
집이 불타도 누나는 오지 않았다
이웃 동네에 내려온 만삭의 처녀가
밤을 도와 싱싱한 사내애를 낳고 갔다는 소문이 퍼졌을 뿐

* 청학동에서 - 송수권 

겨울이 오면 깊은 잠에 들겠다
오랜 순례자의 잠 끝에 비치는 꿈
老子의 흰 수염이라도 만져보겠다
가시내야 山가시내
네 눈동자 그믐밤 같아 정이 들면
너와지붕 추녀끝 고드름 발을 치고
깊은 잠에 들겠다
천지에 죽은 듯이 눈이 쌓이고
뒷산 구름에 눈사태 지면
꿈 깬 잠 도로 들고
꿈속에서 너의 썰매를 끄는 나는 한 마리 개가 되겠다
가시내야 山가시내
山蔘잎에 구르는 네 목소리
꿈속에서도 자주 눈사태처럼 들리고
늦은 二月에서야 나는 저 줄을 선 닥나무밭
닥나무 노오란 닥꽃으로 피어나겠다

 

* 청학동 - 유응교  

푸른 안개 감아 도는 삼선봉 정기아래
민족얼 어려 있는 삼성궁 웅장한데
서당마다 글 읽는 소리 낭랑히 들려오네.

푸른 숲 우거진 골에 산새들 노래하고
느릅나무 가지사이 꽃사슴 노니는데
찬이슬 서늘바람에 산머루 익어가네.

푸른 물 흘러흘러 세월을 씻어내려
천년바위 벗을 삼아 휘돌아 내리는데
달빛만 주춤거리며 떠날 줄 몰라하네.

푸른 솔가지마다 백로들 춤을 추며
속세에 맺은 인연 훌훌히 벗어놓고
예 와서 함께 살자고 하얗게 손짓하네.

 

* 장터목 - 이하석  

바람이 지우고 지워도

늘 새로 밝혀 서는

 

먼 데, 높이

나앉은

천심(天心) 나누는 장터

 

가쁜 숨으로 우련하게 올라서면

낮게 엎드린 채 고개 드는 악착으로

울컥, 원추리 피어 있는

 

구름 위로 뉘 부르는 한 소절 더 높은

바람목 *

 

* 구부러지다 - 김선태
구부러진
지리산 아랫마을 팔순 할미의 허리는
유장하게 굽이치는 지리산 능선을 닮았다
가만 보면
저녁 능선 위에 걸린 초승달과도 겹친다

지리산 품에서 태어나
한평생 지리산만 바라보며 살아왔으니
몸속에 지리산 한 채를 온전히 품었겠다
지리산의 친딸로 스스럼없겠다

팔순 할미의 허리에는
육신을 가파르게 끌고 온 세월도 세월이지만
강물도 산길도 밭두렁도 저녁연기도 있고
구부러진 지리산 유전인자가 다 스며있다

구부러진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
늘그막에 어린 아이가 되어 친정집에 들듯
원점으로 휘어져 회귀하는 일이다

머잖아 지리산이 할미를 불러들일 것이다

 

* 하동포구에서 굽이굽이 - 고재종 

구례에서 하동까지 산첩첩 물첩첩으로 팔십여 리. 아침골안개 물안개 수작이 끝나면, 산은 산벚꽃 참진달래 홍도화를 우르르 터뜨려선, 그것들의 새하얗고 붉디붉은 무작정 서러운 빚깔이거나, 강은 도요새 댕기물떼새 흰고니 떼를 속속 날려선, 그것들의 신신하고 유유한 하릴없이 아득한 날갯짓이거나로, 시방 내겐 요렇듯이 가슴 벅차고 치미게끔 한통속이다.


강 곁에 모람모람 들어앉은 마산면 피아골 화개면 집들, 산 위 구중심처의 화엄사거나 쌍계사 절들을 보면, 어디가 이승이고 어디가 피안인지. 난 다만 봄볕 융융한 그 사이에서 저기 달래 냉이 자운영을 캐는 산사람들 본다. 저기 은어 쏘가리 버들치를 건지는 강사람들 본다. 저들 저렇듯이 산길 물길로 흐르며 마음엔 무슨 꽃을 피우는지. 어떻게 새는 날리는지.


난 다시 꽃구름에 홀리고 새목청에 자지러져선, 우두망찰, 먼 곳을 보며 눈시울 함뿍 적신다. 그러다 또 애기쑥국에 재첩회 한 접시로 서럽도록 맑아져선, 저 산 저렇듯이 사람들의 그리움으로 푸르러지고, 저 강 또한 사람들의 슬픔으로 그렇게 불었던 것을 내 아둔패기로 새삼 눈치라도 채는가 마는가. 시방은 눈감아도 저기 있고 눈떠도 여기 있는 한세상 굽이굽이다.


지리산이여, 하면 내가 네 노루막이 위 청천에 닿고, 섬진강이여, 내가 네 자락 끝의 창해에 이르는 길을 찾기는 찾겠는가. 가슴속의 창날 우뚝우뚝한 것으로 스스로를 찔러 무화과 속꽃 한 송이 피울지라도, 가슴속의 우북두북한 것으로 깃을 쳐 죽을 때 꼭 한번 눈뜨고 죽는다는 눈먼새 한 마리쯤 날릴지라도, 생의 애면글면한 이 길, 누구라서 그예는 일렁이지 않겠는가.
* 고재종시집[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시와시학사

* 밤 편지 -하동 행 - 곽재구

늦은 밤

구례구역 앞을 흐르는

섬진강변을 걸었습니다

착한 산마을들이

소울음빛 꿈을 꾸는 동안

지리산 능선을 걸어 내려온 별들이

하동으로 가는 물길 위에

제 몸을 눕혔습니다

오랫동안

세상은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압과 고통 또한 어두운 밤길과 같아서

날이 새면 봉숭아꽃 피는 마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 아직 스무 살 첫 입맞춤의 추억

잊지 않았습니다

폭염 아래 맨발로 걷고 또 걸어

눈부신 바다에 이르렀을 때

무릎 꺾고 뜨겁게 껴안은

당신의 숨소리 잊지 않았습니다.

* 곽재구시집[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 연기암에 올라 -정태춘에게 - 곽재구

연기암에 올라
해지는 섬진강을 보았습니다


허리 굽은 구례 사람들
등불 하나씩 들고
강변 논밭에 주저앉고  

노을이 느린 걸음의
강물을 따라 나서는 동안
어둠이 깊은 포옹으로
산을 껴안는 것을 보았습니다  

깊이 사랑했으므로
그들의 뼈는 소리없이 부딪치다가
산계곡을 타고 올라
하늘의 시린 강이 되었습니다

연기암에 올라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사랑했으나 쓸쓸히 헤어진
사람들의 눈망울들
들판 멀리 지천으로 깔렸습니다

하룻밤을 걷고
열흘 밤을 걷고
천 날을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들이
별들 사이 펼쳐져 있습니다

* 곽재구시집[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 지리산둘레길 - 박남준

그대 몸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은 무엇에 두었는가
지리산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몸 안에 한 그루 푸른 나무를 숨쉬게 하는 일이네
때로 그대 안으로 들어가며 뒤돌아보았는가
낮은 산길과 들녘, 맑은 강물을 따라
사람의 마을을 걷는 길이란
살아온 발자국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네
숲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생명의 지리산을 만나는 길
어찌 집으로 가는 길이 즐겁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대 안에 지리산을 맞이하여 모신다는 일
껴안아준다는 것이지
사랑한다는 것이야
어느새 가슴이 열릴 것이네
이윽고 눈앞이 환해질 것이네
그대가 바로 나이듯
나 또한 분별을 떠나 그대이듯이
그대와 나 지리산이 되었네
그대와 나 지리산둘레길이네

 

* 쌍계사 되새떼 - 손택수

쌍계사 대숲 속에는 되새떼가 산다지 아마

본디는 서울 근교에 모여 살다가

일족 모두 출가라도 한 듯

낮이면 강마을 탁발을 다니고

해넘이 하늘 한 폭 점묘화를 그리며 돌아온대지

겨울 섬진강가에 가서 만나고 싶구나

길 위에 함부로 박힌 마침표들을 차면서, 굴리면서

돌돌 우리는 또 얼마나 작아져야 하는지

물소리 바람소리 흐르다간 맴돌다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추억들, 되새기며

점점... 점점점... 모래밭 되새떼

날개죽지에라도 간신히 매달려

하늘 끝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가

떠오르고 싶구나 총총... 총총총...

저녁 연기 오르는 대숲마을

네 젖은 눈동자 위에서 그렁대는 한 무리 저 별자리처럼

 

* 노고단에 여시비 내리니 - 이성부

노고단에 여시비가 내리니

산길 풀섶마다

옛적 어머니 웃음빛 닮은 것들

온통 살아 일어나 나를 반긴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지천 듣고

고개만 숙이시더니

정재 한구석 뒷모습

흐느껴 눈물만 감추시더니

 

오늘은 돌아가신 지 삼십여년 만에 뵙는

 어머니 웃음빛

이리 환하게 풀꽃으로 피어 나를 또 울리느니!

 

* 정령치 - 복효근

정령치 마루에 서서 보면

내가 음습한 골짜기에서 살았음을 안다

봉우리는 그냥 솟은 게 아니라

저 길들이 알탕갈탕 밀어올린 것이라는 것을 안다

오던 길로 내려서거나

반대편 달궁으로 내려가더라도

골짜기로 가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 중간엔 이렇게 한 고비가 버티고 있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다고, 어렵다고 한다

정령치는 길을 먼저 풀어 보내서

꿈틀꿈틀 내려가는 법을 일러준다

같은 골짜기로 내려가더라도

한 고비 거쳤으니 이젠

깊어져, 아득히 깊어져야 한다고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청학동을 찾다가 -靑鶴洞 - 李仁老  

頭流山逈暮雲低 - 두류산 아득하고 저녁 구름 낮게 깔려
萬壑千岩似會稽 -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 회계산을 닮았네 
策杖欲尋靑鶴洞 - 지팡이 의지하여 청학동을 찾아가니 
隔林空聽白猿啼 - 숲속에는 부질없는 산짐승의 울음소리뿐
樓臺縹緲三山遠 - 누대에선 삼신산 아득히 멀리 있고 
苔蘚微茫四字題 -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 희미하다 
試問仙源何處是 -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이 그 어느 멘가 
落花流水使人迷 - 꽃잎 흘러가는 물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 파한집

 

* 삼홍소(三紅沼) - 南冥 曺植 
흰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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