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 나태주
봄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아직은 겨울이지 싶을 때 봄이고
아직은 봄이겠지 싶을 때 여름인 봄
너무나 힘들게 더디게 왔다가
너무나 빠르게 허망하게
가버리는 봄
우리네 인생에도
봄이란 것이 있었을까? *
* 나태주시집[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2015
* 禪問 - 함민복
위에서 아래로 따르는
물을 받을 수 있는 종이컵에
아래서 위로 초를 꽂아
불을 담아 들고 있네 *
* 동지(冬至) - 함민복
한석봉 어머니 깜박 책을 써는 사이//
한석봉이 꾸뻑 떡을 읽는 사이 *
* 함민복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1996
* 사람이 풍경으로 태어나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 잠들기 전에 - 이시영
내 영혼은 오늘도 꽁무니에 반딧불이를 켜고 시골집으로
갔다가 밤새워 맑은 이슬이 되어 토란잎 위를 구르다가 햇볕
쨍쨍한 날 깜장고무신을 타고 신나게 봇도랑을 따라 흐르다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생이 되어 기나긴 목화밭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출근했다가 아몬드에서 한잔 하다가 밤늦은 시간
가로수 긴 그림자를 넘어 언덕길을 오르다가 다시 출근했다가
이번에는 본 적 없는 어느 광막한 호숫가에 이르러 꽁무니의
반딧불이도 끄고 다소간의 눈물 흘리다. *
* 이시영시집[은빛 호각]-창비, 2003
* 그리움 2 - 김용택
이 세상 그리움들이 모여
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득 달을 보면
참 달이 밝기도 하구나 라고 말한다
* 달팽이 약전(略傳) -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벗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生이 있었다. *
* 벼랑 끝 - 조정권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 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한밤중을 느꼈습니다.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
* 예감 - 김수열
출근길 허리 잘린 어린 국화 박카스병에 담아 책상 위에 놓으니 보라색 향기 교무실에 그윽하다 오늘 하루 아이들이 어질 것 같다 * * 구룡포 달인 - 김영삼 할머니가 바람 보러 간다 허름한 단층 슬래브 집 모퉁이 사십 년을 꼬박꼬박 오르내린 계단도 늙었다 백발 같은 국숫발이 빼곡히 널려 있는 옥상 난간에 서서 바람 깊숙이 손을 집어넣는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엄지와 검지로 바람 속살을 살살 비비며 만지작거린다 풍향에 따른 염도를 재는 것이다 밀가루 반죽하기 전에 반드시 치르는 의식인데 -오늘은 제일 좋은 북동풍이여, 소금은 두 종지면 돼야 -해풍에 말린 국수는 잘 불지도 않고, 삶으면 물도 맑아 생활의 달인이 손끝으로 귀신같이 국수 간을 맞춘다 * * 여름 플라타너스 - 고운기 여름이 와서야 큰바람이 불고 잎 속에 숨었던 옛 잎이 떨어졌다 이제 되었다 성장(盛裝)한 플라타너스여 짙은 그늘마저 산뜻한 속옷처럼 유쾌하다 * *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내 열여섯 세상에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가장 따뜻했던 저녁 *
* 광대 채플린 - 김정환
울음이 묻으면 웃음은 더 진하지. 그때 비로소
웃음은 제 무게 때문에 속세의 것으로 된다.
그때 비로소 인생을 거지로 전전할 수 있다.
나이테에 백인 사람의 표정이 언뜻 보이다 사라질 때
그 웃음의 윤곽을 울음이 허물고 뭉그러진 울음의
부패를 웃음이 수습할 때 그때 우리는 인생의
종착지에 와서도 길이 멀다. *
* 김정환시집[순금의 기억]-창비, 1996
* 그런 말들이 2 - 김경미
모두가 받았다는 초대장 끝내 도착하지 않은
저녁의 현관 우편함
현관 너머까지 불려온 낙엽들 그러모아
빈 우편함에 넣는다
그러면 되었다 그러면 되었다는
그런 말들 *
* 김경미시집[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2008
* 소처럼 웃다 - 이시영
중학교 일학년 일학기 때였다. 하굣길에 아래냇가 방천둑에서 소를 뜯기고 있던 아버지를 만났다.
다가가 모자를 벗고 인사를 올렸더니 아버지가 진짜 소처럼 웃었다. *
* 이시영시집[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2012
*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함민복
살며 풀어놓았던 말
연기라
거두어들이는가
입가 쪼글쪼글한
주름의 힘으로
눈 지그시 감고
영혼에 뜸을 뜨고 있는
노파에게
거기는 금연구역이라고 *
* 이런 꽃 - 오태환
순 허드레로 몸이 아픈 날
볕바른 데마다
에돌다가
에돌다가
빈 그릇 부시듯 피는 꽃 *
* 가을 소묘 - 함민복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
* 함민복시집[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2013
* 가을 길 - 최명란
가을 길을 걷는다
펼쳐진 낙엽마다
발을 맞추며 걷는다
플라타너스 낙엽은
내 신발보다도
아빠 신발보다도 크다
한 철 자란 잎이
십 년 자란 내 발보다
더 크다 *
* 최명란시집[수박씨]-창비,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