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세한 - 장석남

효림♡ 2018. 3. 12. 05:19

* 세한(歲寒) - 장석남

소나무들이 늘어서서 외롭다
소나무는 연대하지 않는다
독자 노선의 소나무마다는
바람의 사업장이다
대장간이 되어 연장을 벼리다가
사나운 준마들을 키운다
나의 뺨은 얼어간다
늑골 아래 연인은 기침을 한다 바람은
재빨리 기침을 모아 갈밭 속에 뿌리고
지난 모든 계절의 왕국들이
찢겨 펄럭인다
이 비탄의 풍경 속에서
나는 천천히 걸어나왔고
그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술잔을 나누던 이 여럿 바뀌지 않았는가
술에 밤하늘의 빛들이 녹는다
술잔을 나누던 이들 늘어서서 외롭다 *

 

* 소풍

소매 끝으로 나비를 날리며 걸어갔지

바위 살림에 귀화(歸化)를 청해보다가 돌아왔지

답은 더디고

아래위 옷깃마다

묻은 초록은 무거워 쉬엄쉬엄 왔지

푸른 바위에 허기져 돌아왔지

답은 더디고 *

 

* 입춘 부근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 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

 

* 다섯켤레의 양말

나의 디자인, 이 구성진 디자인

궁상각치랑 우 도레미 도레미

썰물에 낚시를 드리우고 내 낚시에 끝까지 걸려들지 않던 어린 날

참으로 아름답던 다섯 마리 물고기의 유영을

나의 방바닥에서 본다

 

그러나 오, 다섯켤레의 혀들

나는 내 혀가 지은 죄 때문에 내 혀를 끊을 용기는 없었다

내 혀는 나를 말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혀는 자주 나의 것이 아닌 것

내 손이 써나가는 문장을 차라리 내 혀라고 말하고 싶지만

세상은 혀끝에서만 머문다

 

각색 양말을 빨아 방바닥에 널어놓고
나도 모르게 짝을 맞춰 그리해놓고
나는 그리해놓았다
전에는 없는 일이라 핸드폰으로 찍어놓고
나는 흐뭇하다  

 

* 개두릅나물

개두릅나물을 데쳐서
활짝 뛰쳐나온 연둣빛을
서너해 묵은 된장에 적셔 먹노라니
새장가를 들어서
새 먹기와집 바깥채를
세 내어 얻어 들어가
삐걱이는 문소리나 조심하며
사는 듯하여라
앞산 모아 숨쉬며
사는 듯하여라 *

 

* 눈사람의 스러짐

나는 녹는다

먼 옛날의 말씀이 나를 녹인다

나를 만들던 손은 나를 떠난 즉시 나를 잊었을 것

나는 소리친다 소리친다

누구도 듣지 않으므로

발밑에서 질척인다 나의 외침은

 

나의 스러짐

이것이 무엇입니까? 외침은

오래된 종소리와 같다

종소리의 멀어짐과 같고

종소리의 반복과 같다

소리가 되다 남은 종과 같이 침울하고 어두컴컴하다

 

나의 외침이 마저 사라지기 전

나는 이렇게 더 뇌어본다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입니까?

보일러가 으르렁대는 밤

나는 낯선 수로를 걸어갔다 *

* 차를 마시다니

차를 마시다니

꽃이 피다니

 

목구멍으로 무엇을 넘기다니

꽃을 보다니

 

해변을, 파도 끝을, 신 벗어들고 걷다니

웃음까지도 생기다니

배가 고프다니.....

 

분노여 입을 벌려라

바다를 넣겠다

쏟아넣겠다

 

분노여

변덕이 심한 짐승이여

바다를 모두 먹어라

 

바다여, 분노의 이름으로 영원히 철썩여라 *

* 대장간을 지나며

나에겐 쇠 뚜드리던 피가 있나보다

대장간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안쪽에 풀무가 쉬고 있다

 

불이 어머니처럼 졸고 있다

?침침함은 미덕이니, 더 밝아지지 않기를

 

불을 모시던 풍습처럼

쓸모도 없는 호미를 하나 고르며

둘러보면,

고대의 고적한 말들 더듬더듬 걸려 있다

 

주문을 받는다 하니 나는 배포 크게

나라를 하나 부탁해볼까?

 

랑을 하나 부탁해볼까?

아직은 젊고 맑은 신(神)이 사는 듯한 풀무 앞에서

꽃 속의 꿀벌처럼 혼자 웅얼거린다 *

* 불멸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 

 

* 장석남시집[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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