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별 - 오태환

효림♡ 2018. 3. 8. 09:00
* 별 - 오태환
- 어느 날 나는 꿈에서 허블망원경을 쓰지 않고도
  우주의 아주 먼 곳까지 구경하게 되었다


 모퉁이를 따라 여우비처럼 맑게 뿌리는 별들 좀 보세요 연(蓮)뿌리가 잔뜩 드러난 진흙구렁 성운을 끼고, 좀생이별이 소금쟁이나 물장군 흰 민물새우나 되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쭈뼛쭈뼛 밑금 그으며 헤엄치네요 물낯에 빗물자국같이 아롱아롱 투명하게 번지는 별빛들도 그럴싸하구요 푸른 개구리알로 송아리째 뭉친 별무리를 비껴, 여기저기서 물수제비뜨듯 치르르르르 치르르르르 내닫는 싸라기별들은 구경거립니다.


 꿈에서도 산해경(山海經) 갈피에도 별빛이 드나 싶네요 대황북경편(大荒北經篇) 바깥쪽에서부터 하린 손톱자국같이 긁힌 흔적은 살별(彗星)인데요 1억 광년쯤 에두르기만 하다가 그만 허방다리에 삐끗! 한쪽 발을 빠뜨리고 만 거래요 그 아래로 산호(珊瑚)가 무성한 별들 사이에 숫눈에 개발자국처럼 가뭇가뭇 찍힌 별들이 보이시는지는 모르겠어요 개라 하기도 뭣하고 안 그러기도 뭣한 하늘개(天狗)란 녀석들이 소행입니다 녀석들은 한결같이 별자리들을 황남총 금관처럼 머리에 쓰고 다니는데, 성질이라도 부릴라치면 꼬리 끝에 매단 블랙홀을 채찍처럼 휘두른답니다 아, 저기 모여 있군요 물똥처럼 별빛을 지린 행간(行間)을 건너, 금관에 달린 영락(瓔珞)과 곡옥(曲玉)을 마구 찰랑거리며 진짜 개떼처럼 짖고들 있군요


 어떤 별빛은 조리복소니로 깎여도 숫돌에 벼린 듯하고, 어떤 별빛은 덧물을 걷어내도 막 건진 동치미 무같이 새금새금 아삭한 맛이 그만이네요 꿈도 암꿈과 수꿈이 있다는데, 별들이라고 무슨 뾰족수 있겠어요 붉은 옷을 입힌 농짝 같은 하늘 바탕을 무슨 자개 쪼가리처럼 다닥다닥 메우는 별들이 보이시는지요 황새치자리 너머 시집가는 별똥별의 혼수품이랍니다 논보라 퍼붓는 기암괴석 같은 별빛들 품에는 또 해감내 나는 별빛들도 있고, 또 안경잡이 나귀 새끼가 되어 하웅하웅 우는 별빛도 있습니다 푸른 미채(微彩)의 가스구름 부근, 햇빛 하나는 뜨자마자 벌써 마파람 탄 감꽃받침처럼 마르기 시작하는데요 하여튼 나는 순공짜로 구경 한 번 잘 하고 왔습니다   

 

별들을 읽다 

별들을 읽듯이 그녀를 읽었네

가만가만 점자(點字)를 읽듯이 그녀를 읽었네

그녀의 달걀빛 목덜미며

느린 허리께며

내 손길이 가 닿는 언저리마다

아흐, 소름이 돋듯 별들이 돋아

아흐, 소스라치며 반짝거렸네

별들을 읽듯이 그녀를 읽었네

하얀 살갗 위에 소름처럼 돋는 별들을

점자(點字)를 읽어내리듯이

내 손길이 오래 읽어내렸네

그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낱말들의 뜻을

눈치 못 채서 참 슬픈

내 손길이 그녀를 오래 읽어내렸네

그녀를 읽듯이 별들을 읽었네

그녀를 읽듯이 별들을 읽었네

춘천 가는 길 백봉산 마루께에 돋는 별들을

점자(點字)를 읽듯이

희미한 연필선으로 반짝거리는 그녀의,

낱말들의 뜻조차 알지 못하면서

서운하게 서운하게 

 

* 별빛들을 쓰다 

  필경사(筆耕師)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묵란(墨蘭)잎새처럼 쳐 있는 것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매빛 갈매빛의 계곡 물소리로 반짝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圖章)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고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뜬 흰 섬들을 바라보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치자 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삐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쓸 수밖에 없음을 지금 알겠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녹청(綠靑)기왓장 위 별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봄이 돌아오니 - 문태준  (0) 2018.03.19
세한 - 장석남  (0) 2018.03.12
배꽃 - 곽재구  (0) 2018.03.02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0) 2018.02.28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 오상순   (0) 2018.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