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화과 - 곽재구
먹감색의
작은 호수 위로
여름 햇살
싱싱하다
어릴 적엔 햇살이 나무들의 밥인 줄 알았다
수저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천히 맞이하는 나무들의 식사시간이 부러웠다
엄마가 어디 가셨니?
엄마가 어디 가셨니?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면
그중의 한 나무가
배고픈 내게 물었다 *
* 곽재구시집[와온 바다]-창비,2012
* 배꽃
배꽃들은 황토산 자락에
연분홍 첫사랑의 숨결을 토해놓지
포옹하는 법
입맞춤하는 법
한없이 서툴어도
가슴의 뜨거움 하나로
황토산 자락 억세게 끌어안지
한번 들어봐
무릎 꿇고
귀 깊게 대고
어디서 피가 끓는지
어디서 슬픔의 그늘이 드리우는지
누구의 뼈가 제일 먼저 강을 건너는지
바보 같은 웃음
바보 같은 사랑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행복한 것인지
어깨 으스러질 듯
못생긴 산과 하늘 부둥켜안으며
배꽃들은
황토산 자락에
연분홍 첫사랑의 숨결을 토해놓지.
* 곽재구시집[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연화리 시편9
그 날
당신이 높은 산을
오르던 도중
후,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하릴없이
무너지는 내 마음이
파,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그 많은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 곽재구시집[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 백합 -연화리 시편27
당신이 고통으로 흔들리는 그 순간마다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에서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당신이 주체할 수 없는 정신의 방황으로
아름다운 긴 머리칼마저 흐트러뜨릴 때
내 마음의 뜨거운 골짜기에서
진실로 순결한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어느 날
당신은 나를 떠나겠지요
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찬란한 바다
모든 파도가 슬픔으로 술렁이는
그날도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에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
* 곽재구시집[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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