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다시 봄이 돌아오니 - 문태준

효림♡ 2018. 3. 19. 09:00

* 다시 봄이 돌아오니 - 문태준
누군가 언덕에 올라 트럼펫을 길게 부네
사잇길은 달고 나른한 낮잠의 한군데로 들어갔다 나오네
멀리서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네
산속에서 신록이 수줍어하며 웃는 소리를 듣네
봄이 돌아오니 어디에고 산맥이 일어서네
흰 배의 제비는 처마에 날아들고
이웃의 목소리는 흥이 나고 커지네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이 하려 하네
심지어 여러 갈래 진 나뭇가지도
양옥집 마당의 묵은 화분도 *

 

* 호수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

 

* 연꽃

산골짜기에서 떠온 물을 너른 대접에 부어놓네

담겨진 물은 낮춰 대접에게 잘 맞추네

 

나는 일 놓고 연꽃만 바라보네

연꽃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활짝 핀 꽃 깊고 깊은 곳에

어머니의 음성이 흐르네

 

흰 미죽(糜粥)을 떠먹일 때의 그 음성으로

 

산중(山中) 제일 오목한 곳에 앉은 암자(庵子)의  모양대로 *

 

*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환한 등불

남을 온기

움직이는 별

멀리 가는 날개

여러 계절 가꾼 정원

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

풀에게는 풀여치

가을에게는 갈잎

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

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

날마다 석양

너무 큰 외투

우리는 서로에게

절반

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

 

* 입석(立石)
그이의 뜰에는 돌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돌을 한참 마주하곤 했다
돌에는 아무것도 새긴 게 없었다
돌은 투박하고 늙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그 돌에 매번 설레었다
아침햇살이 새소리와 함께 들어설 때나
바람이 꽃가루와 함께 불어올 때에
돌 위에 표정이 가만하게 생겨나고
신비로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그리하여 푸른 모과가 열린 오늘 저녁에는
그이의 뜰에 두고 가는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듯이
돌 쪽으로 자꾸만 돌아보고 돌아보는 것이었다 *

 

* 일일일야 (一日一夜)

꽃나무는 꽃나무가 그린 화첩을 펼친다

사람들은 하얀 접시에 봄의 급식을 받는다

누구라도 초조하지 않고

누구라도 딸기처럼 안색이 좋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가는 공원은 평년 기온을 즐긴다

탄력 있는 덤불 옆에 탄력 있는 덤불이 있고

사람들은 꽃나무 아래서 서로의 콩트를 읽는다

나른하게 낮잠을 즐긴다

낮잠 위로는 또 꽃잎이 날려 꿈을 얇게 덮는다

오, 우리가 이처럼 잠잘 때

우리의 봄꿈은 밤까지 그리고 다시 낮까지

꼬박 하루만 이어졌으면 *

 

* 문태준시집[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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