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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꽃 - 이정록

효림♡ 2018. 4. 6. 09:00

* 봄바람 - 이정록

식은 재 한 삼태기,

불 아궁이를 지나왔나요.

오늘은 호박 심는 날

봄바람이 따뜻하네요.

똥 웅덩이에 코를 대보고

거름 웅덩이에 손을 넣어보네요.

호박 모종 심을 웅덩이는

알맞는 깊이와 넓이 인지

물은 충분히 스몄는지

실눈 뜨고 살펴본 봄바람이

내 귓볼에 대고 속삭이네요.

장마에 물웅덩이에 빠지지 말고

술 취해 똥구덩이에 빠지지 마세요.

가을걷이에 빚더미에 빠지지 말고

아흔 살 전에는 절대로

무덤 웅덩이에 빠지지 말아요.

귀엽게 호박씨를 까네요.

볼우물 씰룩댈 때마다

거름 냄새가 피어나네요.

오늘은 호박 심는 날

두근두근 봄바람이 나네요. *

 

* 알음알음

옹달샘의 물방울 하나가 알음알음 바다로 갑니다.

파도 속 물방울 하나가 알음알음 옹달샘을 그립니다.

 

벌레 먹은 나뭇잎 하나가 알음알음 씨앗 속 떡잎을 떠올립니다.

씨앗 속 떡잎 한 장이 알음알음 천 년 전 태풍에 떨던 벌레 먹은 나뭇잎에게 굽은 손을 펼칩니다.

 

조각구름 하나가 알음알음 지구 반대편 새털구름의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알음알음 조각구름에게 건네달라며 홍학의 깃털에 새털구름이 편지를 씁니다.

 

만년설에 갇힌 모래 하나가 알음알음 친구가 많은 사하라 사막 모래를 찾아갑니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알이 답장을 써서 알음알음 건네려다가 모래바람에 숨이 막혀서 재채기를 합니다.

 

알음알음 사막의 재채기 소리에 만년설이 무너집니다.

사실은 모래 한 알을 따라 알음알음 언 모래 세 알이 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꽝꽝 얼어붙어 있었던지, 알음알음 산 하나가 따라 나선 거죠. *

 

* 비꽃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한 방울 한 방울 성글게 떨어지는 걸

비꽃이라 부르지요.

구름꽃이 땅바닥에 그리는

물방울꽃이지요.

구름 화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물로 되어 있어요.

손도 물이고, 똥도 물똥만 싸요.

방귀 소리는 얼마나 큰지

하늘도 번쩍번쩍 놀랄 때 많아요.

구름 화가는 온몸이 붓인데요.

붓대도 붓털도 물로 만들어요.

참 신기하죠. 조금 기다려봐요.

안마당과 세숫대야와 지붕에

빠른 붓질로 비꽃을 피울 거예요.

수많은 물붓을 언제 모았을까요.

빗물 웅덩이는 꽃주머니예요.

냇물이 엄청 불어났군요.

꽃잎이 흥얼흥얼 노랠 부르며

바다꽃주머니로 흘러가요. *

 

* 이정록시집[동심언어사전]-문학동네,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