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더 깝깝허까이 - 박성우
강원도 산골 어디서 어지간히 부렸다던 일소를
철산양반이 단단히 값을 쳐주고 사왔다
한데 사달이 났다 워워 핫따매 워워랑께,
내나 같은 말일 것 같은데
일소가 아랫녘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한다
흐미 어찌야 쓰까이, 일소는 일소대로 갑갑하고
철산양반은 철산양반대로 속이 터진다
일소를 판 원주인에게 전화를 넣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저번참과 똑같단다
그 소, 날래 일 잘했드래요 *
* 이웃
새터할매네 매실나무 가지가
텃밭 드는 길 쪽으로 넘어왔다
가지를 뻗고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
우리 집 텃밭으로 드는 길을 딱 막고
매실을 주렁주렁 욕심껏 매달았다
내 것이 아니어도 오지고 오진 매실,
새터할매 허리 높이에서 마침맞게 익어갔다
새터할매가 매실을 따간 뒤에, 나는
매실나무 가지 밑에 바지랑대를 세워
막혀 있던 길을 열어보았다
우리 집 호박줄기는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지 밭 놔두고
새터할매네 밭으로만 기어들어가 잘 살았다 *
* 또 하루
날이 맑고 하늘이 높아 빨래를 해 널었다
바쁠 일이 없어 찔레꽃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텃밭 상추를 뜯어 노모가 싸준 된장에 싸 먹었다
구절초밭 풀을 매다가 오동나무 아래 들어 쉬었다
종연이양반이 염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가고 있었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 눈물
내 눈물이 아닌 다른 눈물이 내게 와서 머물다 갈 때가 있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안에 들어 울다 갈 때가 있어
* 짜장면과 케이크
마을버스 정류장 모퉁이에 구둣방이 있다
한사람이 앉을 수는 있으나
누울 수는 없는 크기를 가진 구둣방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구둣방에 갔을 때였다
구둣방 할아버지는 수선용 망치로
검정 하이힐 굽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구둣방 귀퉁이에
짜장면 빈 그릇 세 개가 포개져 놓여 있었다
어, 이거? 구둣방 할아버지는
위쪽 빵집 젊은 사장과
아래쪽 만두가게 아저씨가 와서
짜장면 송년회를 해주고 갔다고 했다
구둣방이 좁아 둘은 서서 먹고
구둣방 할아버지는 앉아서 먹었단다
구둣방 왼편에 놓인 서랍장 위에는
케이크 한조각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검정 구두약 통 두 개와
한뼘 반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
누가 놓고 간 거냐고 묻지 않아도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알 수 있는
아내의 구두를 구둣방에 맡긴 나는
빵집으로 가서 빵 몇 개를 골라 나왔다
아내의 구두를 찾아갈 때는
만두가게에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세밑이 따뜻해져왔다
* 박성우시집[웃는 연습]-창비,2017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 서정주 (0) | 2018.08.02 |
---|---|
뻐꾸기 소리는 산신각처럼 앉아서 - 문태준 (0) | 2018.07.11 |
봄꽃나무 한 그루 - 심재휘 (0) | 2018.04.08 |
비꽃 - 이정록 (0) | 2018.04.06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0) | 2018.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