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은 罪 - 김동환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한모금 달래기에 샘물 떠주고
그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平壤城에 해 안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罪밖에 *
* 죄 - 김용택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지겠고
무겁고 깨질 것 같은 그 독을 들고 아둥바둥 세상을 살았으니
산 죄 크다
내 독 깨뜨리지 않으려고
세상에 물 엎질러 착한 사람들 발등 적신 죄
더 크다. *
* 고백성사 - 김종철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
* 못을 뽑으며 - 주창윤
이사를 와서 보니
내가 사용할 방에는
스무여 개의 못들이 필요 이상으로 박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어디에라도 못을 박는 일
내가 너에게 못을 박듯이
너도 나에게 못을 박는 일
벽마다 가득 박혀 있는 못들을 뽑아낸다
창 밖으로 벽돌 지고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못자국
그 깊이에 잠시 잠긴다
뽑음과 박음, 못을 뽑는 사람과
못을 박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못을 뽑고 벽에 기대어 쉬는데
벽 뒤편에서 누가 못질을 한다. *
* 죄 - 함민복
불완전한 인간을 만든
신의 아프터써비스는 용서다
* 죄 - 함민복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 함민복시집[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2005
* 먹은 죄 - 반칠환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 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 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 죄 - 이기철
요컨대 내 생은 밥숟갈을 위한 노역이었다
나는 누굴 위해 살지 않았고
철저히 나를 위해 살았다
나는 내 월급을 데어 남에게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밥숟갈은 아세였고 곡학이었다
나는 남을 사랑할 시간이 없었다
내 안에 꽃피는 시간들이 나를 죄짓게 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용서받아야 하는가
다리가 아프도록 서서 읽은 편지
대합실에서 읽던 시
그런데 나는 왜 눈물 흘리는 새에 대해서는
한 줄도 안 썼는가
서리의 예감에 몸을 더는 나무에 대해서는?
안 굽어지려고 기를 쓰는 분재묘목에 대해서는?
바닥이 즐거운 넙치에 대해서는?
아,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그리운 바보가 된 사람을 위해서는? *
* 이기철시집[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서정시학
* 그리운 죄 - 고재종
산 아래 사는 내가
산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이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은
눈 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 사랑이 죄지 - 이정하
걷다 보니 또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러지 않기로 수없이 다짐해 놓고
오늘 또 그 약속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그대는 난처한 얼굴로 돌아서지만
내가 무슨 죄입니까,
사랑이 죄지.
그대여,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랑을 탓 하십시오.
* 속죄 - 정호승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나는 그만 돌을 들어 그 여자를 치고 말았다
오늘도 새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고 간다 *
* 용서의 의자 - 정호승
나의 지구에는
용서의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의자에 앉기만 하면 누구나
용서할 수 있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절대 고독의 의자 하나
쌩떽쥐뻬리의 어린 왕자가
해질녘
어느 작은 별에 앉아 있던 의자도 아니고
법정 스님이 오대산 오두막에 홀로 살면서
손수 만드신 못생긴 나무의자도 아닌데
못이 툭 튀어나와 살짝 엉덩이를 들고 앉아야 하는
앉을 때마다 삐걱삐걱 눈물의 소리가 나는
작은 의자 하나
누군가가 만들어놓고
다른 별로 떠났다. *
* 정호승시집[밥값]-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