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나무 시 모음 2

효림♡ 2019. 1. 30. 09:00

* 나무 - 최창균
겨우내 침묵으로 서 있던 나무들이
이른봄 일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나무기둥의 색깔과 아주 다른
저 연녹색의 가느다란 우듬지를 보면

 

나무가 혀를 쑤욱 빼어문 듯 보인다
나무의 온 생각을 집중시켜놓은 듯
쉴새없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허공을 길게 핥아나간다 그럴 때마다
허공은 파르라니 깨끗이 닦여
나무는 또 한번 세차게 발돋움한다
자꾸만 혀를 움직여 허공을 오른다
허공을 구부려 입 속에 넣는다
그렇게 나무는 자란다
혓바닥이 둥글게 말려 나이테 이룰 때까지
혀가 굳어 생각이 깊어지는 나무가 될 때까지 *
최창균시집[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창비,2004 

 

* 나무의 앞 - 고은  

보아라 사람의 뒷모습

신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저것이 신의 모습인가

 

나무 한 그루에도

저렇게 앞과 뒤 있다

반드시 햇빛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남쪽과 북쪽 때문이 아니라

그 앞모습으로 나무를 만나고

그 뒷모습으로 헤어져

나무 한 그루 그리워하노라면

 

말 한마디 못하는 나무일지라도

사랑한다는 말 들으면

바람에 잎새 더 흔들어대고

내년의 잎새

더욱 눈부시게 푸르러라

그리하여 이 세상의 여름 다하여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단풍

사람과 사람 사이

어떤 절교로도

아무도 끊어버릴 수 없는 단풍

거기 있어라 *

 

* 나무 생각 - 안도현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을 흩뿌리며 물위에 점점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맺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외변산 호랑가시나무 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 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

* 월정사 전나무 숲에서 - 허림

가끔 전생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 생각을 끌고 산속으로 들어서곤 했다

몇백 년을 산 나무 아래 요람에 누운 듯 잠들곤 했다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 같은 햇살의 무늬가 몸 위로 지나갔다

지금은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다만 그런 마음 툭 끊고 시(詩)나 생각하며

아침을 맞이하는 기억의 이면, 지금 나는 현세에 살고 있다

유세차 모년 모일 자정에 깨어 전생에서 돌아와 구둘장에 누워 뒹군다

한 마리 짐승이 입김 허연 긴 한숨 내뿜으며 마흔이 훌쩍 넘도록 덤으로 산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야간경비를 서는 친구를 만났다 
소주에 국밥을 먹고 밤새 별과 어둠의 노래로 긴 목줄기를 적셨다

책 표지가 없는 책을 읽다가 잠들었나보다 그 이전의 시간은 푸른 안개처럼 되감겼다

전생의 기억은 캄캄하다 전나무 숲으로 들어서는 밤 열한 시.

불쑥 내 손을 잡고 끌고 간 길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길이라는 듯 따뜻하다

전나무 숲을 지나온 별들이 내 몸의 혈마다 전나무 바늘잎을 꽂는다

산죽 이파리에 매달린 이슬방울이 생명한다.


* 까치의 생태건축 - 반칠환
망치도 없고, 설계도도 없다

접착제 하나 붙이지 않고, 못 하나 박지 않았다

생가지 하나 쓰지 않고, 삭정이만 재활용했다

구들장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지만

성근 지붕 새로 별이 보이는 밤이 길어 행복하다

저 까치집, 앙상한 겨울나무의 심장같다

주머니 난로 같은 까치 식구들이 드나든다

까치가 집을 지은 나무는 태풍에도 끄떡없다고 한다

까치들이 영악해서 튼튼한 나무만 고른다고 하지만

저 가는 나뭇가지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까치들의 둥지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것인지도 모른다

맑은 노래도 들려주고, 벌레도 잡아주는

까치가 고마워서 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무들은 여름엔 나뭇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엔 낙엽을 떨구어 햇살이 들게 해 준다

나무와 까치는 임대차 계약도 없이 행복하다

 

* 오래된 나무 - 천양희

소나무들이

성자처럼 서 있다

어떤 것들은

생각하는 것같이

턱을 괴고 있다

 

몸속에 숨긴

얼음 세포들

 

나무는 대체로 정신적이다

고고高高하고 고고固固한 것

아버지가 저랬을 것이다

 

오래된 나무는 모두 무우수無憂樹 같다

 

아버지 가고

나는 벌써

귀가 순해졌다

바람 몰아쳐도

크게 흔들리지 않겠다 * 

 

* 그림자와 나무 - 문태준
갈참나무의 그림자들이 비탈로 쏟아지고 있다//
저 검고 지루한 주름들은 나무 속에서 흘러나왔다//
내 몸속에서 겨울 문틈에 흔들리던 호롱불이 흘러나오고, 깻잎처럼 몸을 포개고 울던 누이가 흘러나오고,

한켠이 캄캄하게 비어 있던 들마루가 흘러나오고....//
오후 4시는 그래서 나에게 아주 슬픈 시간이다. 어새날 새 아침//
삼백예순다섯 개의 꽃씨 한 주머니//
깨끗한 두 손에 받았습니다//
이제도 감히 꿈이란 말 할 수 있을까만//
꽃씨 한 알 한 알 환히 눈뜨고 깨어나는//
황홀한 시대의 아침을 위해//
나는 이 겨울 흙이 되고 거름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참 단단한 호두알들//
그것을 깨트는 일,//
바로 우리의 몫으로 남겨 주셨으니 *

 

* 나무에 대하여 - 이성복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를 고스란히 제 뿌리 밑에 묻어 두고, 언젠가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

 

* 나무 - 이근대

세상은

어차피 혼자서 가는거다

 

바람이 너를 흔들어도

슬픔의 눈 뜨지 마라

 

나뭇잎들이 너를 떠나 가더라도

가슴을 치며 몸속에 뿌리를 숨기지 마라

 

네게 붙어 둥지를 트는 새

그것이 세상 사는 힘이 되리라 *

 

* 배롱나무의 안쪽 - 안현미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 보라고 배롱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개심사, 하여 삶은 차도를 보였던가, 바야흐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을 지나 천우사화(天雨四花)로 열리고 싶은 마음이여, 개심사, 얼어붙은 강을, 마음을 기어이 부여잡고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

* 안현미시집[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2014

 

* 겨울나무 속으로 - 신달자

바람 불 때 보인다

몇백 개의 십자가 엉켜 펄럭이는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들 맨몸으로

강풍 에 뼈 부러지도록 흔들리는

극기 지나고 나면

건널 강을 모두 건넜는지

나무 한 그루 마치 교회 같다

바람 잠자고

십자가 하나로 몸 줄인 묵상의 집

나는 강한 손짓에 이끌려

볍게 교회 안으로 들어선다

아하 겨울 마른나무 속이

사람을 눕히고도 그만큼 다시 넓다

생명은 안으로 다 통해 있어서

아래로 내려가면 봄을 안고 있는

따뜻한 뿌리 가늘고 여리지만 톡톡 튀는

생기 있는 말씀들

영하의 강풍을 이기느라 말 없었구나

겨울나무는 지금 미사 중이다 *

* 신달자시집[오래 말하는 사이]-민음사, 2004

 

* 그대 생의 솔숲에서 - 김용택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
 

* 김용택시집[그 여자네 집]-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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