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꽃 만지는 시간 - 이기철 * 흰 꽃 만지는 시간 - 이기철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마라 하얗게 씻은 얼굴로 꽃이 왔는데 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 창고에서 새어 나오며 공기들은 가까스로 맑아지고 유쾌해진 .. 좋아하는 詩 2019.04.22
이것만 쓰네 - 이기철 * 이것만 쓰네 - 이기철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山房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 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 단풍잎 다 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 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 좋아하는 詩 2015.05.11
지상의 끼니 - 이기철 * 지상의 끼니 - 이기철 종일 땀 흘리고 돌아와 바라보는 식탁 위 밥 한 그릇 나를 따라오느라 고생한 신발, 올이 닳은 양말 불빛 아래 보이는 저 거룩한 것들 한 종지의 간장, 한 접시의 시금치 무침 한 컵의 물, 한 대접의 콩나물 국 부딪치면 소리내는 한 쟁반의 멸치볶음 저것들이 내 하.. 좋아하는 詩 2014.04.04
생의 노래 - 이기철 * 생의 노래 - 이기철 옴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 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을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 좋아하는 詩 2014.04.04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 이기철 *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 이기철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한번도 바라보지 못한 짐승들이 즐거워질까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까치도 즐거워질까 급히 달려와 내 등뒤에 연좌(連坐)한 시간들과 노동으로 부은 소의 발등을 위해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 좋아하는 詩 2012.09.19
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 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靑山)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 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 좋아하는 詩 2009.09.02
이기철 시 모음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 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 시인 詩 모음 2009.09.02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 좋아하는 詩 2009.04.06